입시 정책, 또 십리 못 가 ‘발병’
  • 정락인 편집위원 ()
  • 승인 2007.06.25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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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대학, 내신 조정안 싸고 대립…애꿎은 수험생만 ‘쩔쩔’

 
대학 입시의 내신(학교생활기록부) 조정안을 둘러싸고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초 사립대와 교육인적자원부(교육부)의 갈등은 서울대와 교육부가 충돌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개입하면서 올해 대학 입시가 더욱 깊은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연세대·이화여대·성균관대 등 서울 소재 주요 사립대들은 2008학년도 대입 정시 모집에서 내신 성적 상위 3∼4 등급에 모두 만점을 주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 대학들은 지난해 대입 정시 모집에서 교과목 성적 ‘수’와 ‘우’에 내신 만점을 주었다. 지난해에는 절대평가 방식으로 내신을 책정했기 때문에 고교 내신이 합격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올해는 상황이 다르다. 내신이 9등급 상대평가제로 바뀌면서 내신 비중이 커졌다. 5단계(수·우·미·양·가)가 9등급으로 세분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서울대는 1~2등급을, 일부 사립대는 1~4등급을 묶어 평가하려는 것이 내신 등급 조정안이다.
 주요 사립대들은 과거 내신 성적을 5단계로 평가할 때도 수와 우를 만점 처리했다. 수와 우가 상위 40%에 해당해 사실상 내신에 의한 평가는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사립대의 내신 조정 움직임은 내신 위주로 학생을 선발하려는 교육부의 방침과 전면 배치되는 것이다.
교육부가 즉각 반응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교육부는 공교육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처사라며 발끈했다. 강력한 제재 방침도 밝혔다. 내신 등급별로 차이를 두지 않으면 올해 수도권 대학 특성화 사업(6백억원)과 인문학 육성 사업(3백억원) 등 지원 사업을 중단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교육부의 입시 정책에 반기를 든 대학들에는 각종 지원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경고했다.
교육부의 엄포에 사립대는 하루 만에 무릎을 꿇었다. 당초 내신 성적 비중을 축소하려던 방침을 철회한 것이다. 연간 1조8천억원에 이르는 연구 사업비 지원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대는 달랐다. 서울대는 내신 1·2등급을 모두 만점 처리하기로 한 지난 4월의 입시안을 바꿀 수 없다며 맞섰다. 서울대가 입시안을 처음 발표했을 때 교육부는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 교육부가 말을 바꾼 것이다. 노대통령이 ‘내신 무력화 대처 방안’을 지시한 것이 돌변한 이유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나라의 교육 정책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서울대는 교육부의 입장 선회를 ‘불합리한 정책’이라며 비판하고 내신 등급 조정을 철회하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다. 이에 교육부는 강력한 행정 제재 카드를 꺼내 들며 서울대를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다. 서울대가 백기 투항할 때까지 목을 죄겠다는 심산이다.
교육부는 우선 교수 정원을 동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서울대는 지난 5월 초 외국인 교수 100명 등 1백95명의 교수를 증원해달라고 교육부에 신청해놓은 상태이다. 교육부는 서울대가 내신 조정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전면적인 학사 감사도 고려하고 있다. 학사 감사는 서울대뿐만 아니라 고려대와 연세대 등 주요 사립대학을 표적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이번 갈등은 한마디로 학생 선발권을 둘러싼 정부와 대학의 힘겨루기이다. 또 헌법에 명시된 ‘대학의 자율성’이 얼마나 보장되느냐의 문제이다. 정부는 대학의 자율보다는 간섭과 통제를 택했다. 대학 경쟁력을 볼모로 입시 정책을 강요하는 모양새이다.
대학의 학생 선발권은 대학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교육계의 일치된 목소리이다. 대학이 어떤 학생을 어떤 방법으로 뽑느냐는 전적으로 대학의 권한이지 정부가 가타부타 따질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사사건건 간섭하고 있다.


“교육부, 현실 무시한 채 간섭·통제 일관”
고진광 학교를사랑하는학부모모임(학사모) 공동대표는 “정부의 입시 제도는 한마디로 누더기이다. 대학 입시는 대학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 대통령이 나서서 ‘내신 무력화’ 운운하는 것은 협박이나 다름없다. 사립대도 문제이다. 2008년 입시안을 정했으면 올해는 그대로 가야 한다. 언제까지 입시 제도가 갈팡질팡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대학들이 내신 실질반영률을 줄이려는 것은 학교 간에 존재하는 학력 차 때문이다. 현행 내신 비중은 학력 차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학생을 선발하는 변별력이 약한 것이 문제이다. 예를 들어 특목고 학생들은 내신이 더 높은 일반고 학생들보다 수능 성적이 좋은 경우가 있다. 그런데도 내신 등급이 낮아 불합격하는 일이 발생한다.
한준상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는 “고교마다 엄연히 실력 차가 있다. 이를 인정하고 현실적으로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이나 교육부가 필요 이상으로 나서고 있다. 물리적인 제재 방침은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대학 자체에 자정 능력과 변별력이 있다. 대학 일은 대학에 맡겨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고진광 학사모 공동대표는 “사립대가 입시 조정안을 낸 것은 특목고 등 우수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내신을 준비한 서울의 일반 고교나 지방 학교 학생들은 어쩌란 말이냐. 당장 내신 비중을 높이는 것보다 제대로 된 입시 제도를 만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라며 현행 입시 제도의 개혁을 주문했다. 
2008년 입시안이 혼선을 빚자 불안한 것은 일선 고교 교사와 수험생, 그리고 학부모들이다.
수능 시험을 불과 5개월 남겨놓고 터져나온 ‘내신 논쟁’에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수험생들만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꼴이다.
 박문채 전주상산고 입학부장은 “학생들은 지금이 가장 민감한 때이다. 수능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입시안을 변경하겠다는 것은 학생과 학부모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대학 입시는 대학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 그래야 일선 학교와 학생들이 입시를 준비하기가 수월하다”라고 말했다.
한편 2004년 대통령자문 교육혁신위원회 ‘대학입학제도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고교를 동등하게 취급하라는(내신 성적을 50% 반영하라는) 것인데 실제 그렇지 않다. 자연 발생적으로 학력 차가 나는 것이다. 내신의 신뢰성도 없는 상태에서 무조건 대학들더러 받아들이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정부의 교육 정책을 비판했다.
일부 사립대는 입시안에 대해 말을 아끼며 교육부와 서울대의 대립을 지켜보는 상황이다.
지난 6월18일 서울·경인 지역 대학 입학처장협의회 회장단이 긴급 회동을 가졌다. 이들은 7월 초에 이 지역 67개 대학 입학처장들이 모두 참석하는 총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 총회에서 사립 대학들이 교육부와 맞서기로 결정하게 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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