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는 전쟁이 아니라 범죄”
  • 조재민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7.08.0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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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에서 ‘테러와의 전쟁’ 개념 재정립 움직임…대응 전략에도 변화 조짐

 
한국인 납치 사건으로 다시 부각된 탈레반의 테러는 그 명칭과 전략에서 일대 전환점을 맞고 있다. 영국은 테러를 이슬람 지하드(성전)가 아닌 범죄로 규정했다. 테러의 정의가 바뀌면 대응 전략도 달라진다. 이와 때를 같이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내 탈레반 및 알 카에다 소탕 작전에 전술상 오류가 있다고 판단해 작전 지역을 파키스탄 북부로 옮기는 새로운 옵션을 선택했다. 테러에 시달리다 못한 미국과 영국이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는 조짐이다. 
고든 브라운 신임 영국 총리는 런던과 글라스고우의 테러 미수 사건을 무고한 양민에 대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고 향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라고 각료들에게 지시했다. 심지어 테러리즘과 관련해 무슬림이라는 용어 사용도 금지했다. 브라운 내각의 내무장관 자키 스미스는 지하드의 희생자가 종교와 국가를 초월한 모든 영역에서 발생함에 따라 테러리스트의 행위는 성전이 아니라 범죄라고 설명했다.
부시 행정부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최근 ‘장기전’ 혹은 ‘글로벌 전쟁’이라는 말로 대체했다. 브라운 총리는 테러리즘에 대한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정의마저 수정했다. 블레어는 2004년 영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발표하는 연설에서 테러리즘은 서방과 모든 지역의 민주적 가치에 대한 치명적 위협이라고 말했다. 그는 9·11 테러로 이슬람과 서방 사이에는 증오의 씨앗이 뿌려졌고 이는 지구의 종말을 상징하는 아마게돈으로 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브라운은 블레어의 정의가 무슬림 사회와 여타 사회를 분열시켰다고 지적했다. 테러를 범죄로 규정하면 범죄를 예방한다는 대의 차원에서 다양한 사회를 결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 브라운의 논리이다. 다시 말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은 테러를 하는 사회와 당하는 사회를 이분화시킨다는 것이다.

“범죄로 규정하면 공감대 형성도 용이”
브라운의 대변인은 테러를 범죄로 규정함으로써 전세계를 범죄에 대한 저항 세력으로 단결시킬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테러리스트의 정의 문제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논란을 자아냈다. 미국이 테러 ‘전사’들을 고문함으로써 전쟁 포로에 관한 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부시는 이들 전사는 전쟁 포로와는 다르다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전문가들은 이 전사들을 범죄자로 규정하면 이들을 신문하는 데 제네바 협정은 적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테러와의 전쟁 의미를 재정립하는 데는 비판도 따른다. 지금까지의 대테러 전쟁 실패가 용어 때문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전쟁의 성격을 바꾼다고 해서 당장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다. 이슬람 극단주의에 정면으로 대처하는 데 실패한 세대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동조한 세대들이 다음 세대에 얼굴을 들지 못한 것과 똑같은 상황에 직면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슬람의 성전이 서구의 이슬람 착취에서 비롯된 점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얘기이다. 브라운식 논리로는 ‘종교적 열광’에 의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믿고 있는 현실과 대면하지 못하면 실패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브라운의 논리를 지하드에 대한 환멸과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기는 지름길은 인류의 공감을 얻는 것이다. 이 점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이념을 끼워넣는 것은 금물이다. 부시와 블레어는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면서 중동에 민주주의를 건설한다는 명분을 걸었다. 하지만 중동을 포함한 세계 인류의 민심을 획득하지 못했다.
브라운은 여기서 교훈을 배운 것 같다. 그는 부시-블레어 방식이 증오만 증폭시킨 것으로 보았다. 테러의 의미 설정을 놓고 미국과 영국이 다른 시각을 보이는 것은 새로운 상황이다. 현 시점에서는 브라운의 접근이 부시보다는 민심을 얻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이곳에서 성장하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하지 못한 클린턴 행정부를 비난했다. 하지만 착오였다.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아무리 소탕해도 테러리스트들의 저항은 점점 거세진다. 알 카에다와 탈레반의 주력 부대가 아프가니스탄에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3천명의 미군 사망자를 낸 후에 나온 만시지탄이다.
지난 주 미국 정보국이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알 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북부 국경에 위치한 ‘황야’에서 재건되고 있다. 이는 물론 오사마 빈 라덴이 은거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파키스탄을 배제한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에서만 소탕 작전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최근 파키스탄 내 ‘붉은 사원’에 대한 이슬람의 공격은 의미심장하다.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은 지금까지 자국 내 알 카에다 및 탈레반 소탕에 미온적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부에 대한 이슬람 주민들의 반감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러리스트 소탕을 너무 오래 지연시킨 것에 대한 역풍이 정권을 위협하는 사태로 변질되고 있다. 무샤라프는 부시의 주문이 아니더라도 테러 소탕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해임한 대법원장도 복직시켰다. 미국의 정보 기관들은 무샤라프가 뒤늦게나마 워싱턴의 메시지를 읽었다고 분석했다. 파키스탄 북부에 위치한 이른바 ‘연방관할부족지역’(FATA)으로 불리는 테러리스트 본거지에 대한 본격적인 소탕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이다. 이 지역에서는 탈레반의 공격으로 파키스탄군 100여 명이 죽었다. 무샤라프는 최근 파키스탄의 ‘탈레반화’를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파키스탄 내에 탈레반 동조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무샤라프의 약속을 반기면서도 안심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파키스탄군은 핵으로 무장한 인도군의 동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들에게  탈레반이나 알 카에다는 부수적인 문제이다. 파키스탄 내 테러리스트 천국을 즉각 제거하려는 워싱턴의 입장과는 다르다.
주권 국가 안에 있는 테러리스트 은신처를 외국 군대가 분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클린턴 행정부가 대탈레반 작전을 본격적으로 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에 주어진 옵션은 많지 않다. 파키스탄이 자국 내 테러 기지를 궤멸해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대규모 지상군을 아프가니스탄 국경 너머로 침투시키거나 집중적인 공습을 하는 안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옵션은 현실적인 제약이 많다. 빈 라덴이나 탈레반 은거지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을 경우 맹목적 공습은 민간인 사상자만 낼 위험이 크다.
최근 알 카에다가 미국에 대한 제2 테러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 익명을 요구하는 미국 CIA 관리는 그 경우에 미국이 어떻게 대응하겠느냐는 물음에 “차라리 그런 상황이 오면 좋겠다. 우리는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릴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미국의 인내력이 거의 한계에 도달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7월23일 테러와의 전쟁이 새 국면으로 접어든 상황을 심층 분석했다. 이 신문은 이런 사태 발전이 한국인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에서는 이 보도가 남의 일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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