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은 ‘물 난리’ 남쪽은 ‘말 난리’
  • 정락인 기자 ()
  • 승인 2007.08.2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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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10월 연기 배경 두고 설왕설래…한나라당 “대선 이후로 연기” 촉구

 

남북정상회담이 연기되었다. 연기 배경을 놓고 여야의 설전이 한창이다. 한나라당은 애가 탄다. 이명박 후보를 단일 후보로 선출했지만 ‘북풍’이 염려스럽다. 정상회담의 정치적 이용을 경계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상회담 자체를 반대할 명분은 없다. 가만있자니 우려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새로운 변수에 따라 정국이 일순간에 바뀔 수도 있다. 한나라당은 그 돌발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남북한은 당초에 8월28~30일까지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북한에 수해가 나면서 10월로 연기되었다. 예정대로라면 오는 10월 2~4일에 평양에서 열린다. 대선을 불과 두 달여 앞둔 시점이다. 이때는 범여권 국민경선이 한창 진행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각 정파와 대선 캠프는 정상회담 연기에 따른 득실을 계산하느라 바쁘다.
열린우리당·민주신당 등 범여권은 갑작스러운 연기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지원론’을 펴고 있다. 남북한 ‘평화 이슈’를 계속 가져가겠다는 속셈이다. 정상회담 연기가 결코 손해보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한나라당은 연기 이유가 석연치 않다고 본다. ‘무언가 정치적 노림수가 있다’라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이 당내 경선이 끝나자마자 청와대를 향해 포문을 연 것도 이 때문이다. “정상회담을 대선 이후로 연기하라”라고 촉구했다. 어차피 남북 정상이 의제를 합의해도 집행은 차기 정부 몫이라는 주장이다. 이번 정상회담 결과는 차기 대통령이 이행해야 하는 부담으로 넘겨진다는 것이다. 또 핵이 있는 상태에서 회담을 하면 핵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나경원 대변인은 정상회담 의제와 관련해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는 정상회담은 물론 장관급 회담에서도 절대 다뤄져서는 안 된다”라고 쐐기를 박았다.
청와대는 ‘몰상식’이라는 거친 표현을 써가며 한나라당의 주장을 반박했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현직 대통령의 권한을 좌지우지하고 국가 체계를 무시하는 오만한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북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6자회담 틀 내에서 노력할 것이고, 정상회담도 비핵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나라당의 ‘정상회담 연기론’에는 남북정상회담이 범여권의 ‘대선용 이벤트’로 활용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 보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다. 또 미리 정치 쟁점화해서 우려하는 문제에 직면할 경우 물타기하는 효과를 기대하기도 한다. 북한에 내린 비가 남한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형국이다.
정상회담 연기의 표면적 이유는 북한을 물바다로 만든 ‘수해’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 8월7일부터 1주일 이상 퍼부은 폭우로 사망·실종 3백3명, 수재민 8만8천여 가구 30여 만명의 피해를 내고 전체 농경지 11% 이상이

 
침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농업·산업 기반이 완전히 무너졌다. 정상회담 장소인 평양은 40년 만에 물에 잠겼다고 한다. 북한의 수해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북 관계에 수차례 스며든 ‘수해 정치’
그렇다면 정상회담 연기에 다른 정치적인 계산은 없는 것일까. 정상회담 연기를 놓고 여야는 각자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정상회담 연기 배경에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 ‘없다’를 말하는 것은 아직 섣부르다. 다만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인 만큼 갖가지 억측이 난무한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의 ‘약발’을 최대한 키운 후 선거 이전에 메가톤급 카드를 내놓지 않겠느냐는 분석을 내놓는다. 북한이 정상회담을 통해 얻고자 하는 정치적 노림수가 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남한의 대선은 북한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남한 정국 변화에 따라 남북 관계 변화도 불가피해진다. 김대중 정부가 ‘햇볕 정책’을 펴면서 북한은 반사 이익을 챙겨왔다. 노무현 정부는 햇볕 정책을 계승해서 화해 무드를 조성했다.
그러나 최근 남한 정국은 예전과 다르다. 어느 때보다도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높아졌다. 북한은 한나라당에 대해 유독 적대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때문에 한나라당 집권은 북한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는 그나마 호감을 가지고 있다. 박 전 대표는 2002년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적도 있다. 그런데 이명박 후보가 당내 경선에서 승리했다. 북한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북한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남한 정국에 영향을 미치려고 할 것이다. 한나라당 집권을 막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릴 것이 뻔하다. 지금까지 해온 것을 보면 그렇다. 북한이 남한 정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최대의 카드는 정상회담이다. 정상회담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선 코앞으로 연기된 정상회담을 순수하게 보지 않는 이유이다.
 
지난 2000년 제1차 남북 정상회담 때도 북한은 정치적 의도를 내보였다.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갑자기 연기를 통보한 것이다. ‘대북 송금 지연’을 이유로 들었다.
북한은 각종 남북 회담에서도 회담을 연기하거나 무산시키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1996년 6월 베이징 남북 차관급 회담도 그랬다. 양측 대표단이 모두 베이징에 도착했지만 북한이 회담 당일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남측이 지원하기로 했던 10만t의 비료 중 최종분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북한은 비료를 받은 뒤에야 회담에 나섰다. 지난해 8월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던 8·15 남북 공동 행사도 수해로 취소되었다.
남북한 정국에서 ‘수해’가 큰 변수로 작용한 일도 있었다. 1984년 여름. 남한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내린 폭우로 큰 피해가 발생했다. 남북 관계가 교착 상태에 있던 시기였다. 북한은 돌연 남측에 수재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해왔다. 남측이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우리측이 대북 성명을 통해 이를 수락하면서 북한의 수재 물자가 남측에 인도되었다. 이를 계기로 10년 동안 문을 닫았던 적십자 회담이 재개되었다. 서울 도심을 휩쓴 수해가 남북한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 뒤에 남한은 북한에 자연 재해가 닥칠 때마다 수시로 구호품을 보내주었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 북한에 대형 수해가 발생했다. 정상회담이 연기되었다. 올해 ‘수해’는 남북한 정국, 특히 남한의 대선 정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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