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나면 ‘동작 그만’ 힘 빠진 ‘역전의 용사’들
  • 노진섭 기자 ()
  • 승인 2007.08.2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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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들, 퇴역 후 방치…“전문성 살려 싱크탱크로 활용해야”

 

세계 각국을 누비며 전문 역량을 쌓아온 외교관들이 퇴직하면 별 볼일 없는 잉여 인력으로 방치되고 있다. 그들의 노련한 외교 경험과 전문성을 활용할 필요가 절실하지만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고, 전직 외교관의 십중팔구는 외교 업무와 전혀 무관한 일을 하고 있다. <시사저널>이 참여정부 이후 공직을 떠난 일부 대사 출신 전직 외교관들을 접촉한 결과, 10명 중 7명은 뚜렷한 직업 없이 놀거나 외교 분야와 관련 없는 업무에 종사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외교관은 정년으로 은퇴하더라도 오랜 기간 쌓은 외교 경험과 인맥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에 공식·비공식의 외교 업무에 활용할 가치가 충분하다. 그럼에도 이들이 퇴역과 함께 관심 밖으로 밀려나가는 것은 상당한 국가적 손실이다.
이라크 피살 사건과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등을 겪으면서 우리의 외교력이 미약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세계 10위 경제 대국의 위상에 걸맞는 외교력을 갖추지 못해 ‘외교 약소국’을 면할 길이 없다는 불만도 나온다. 이런 분위기 속에 특정 국가나 지역에서 근무했고, 그 나라의 고위 공무원과 인맥이 있는 전직 외교관들을 활용해 외교력을 높여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장동진 교수는 “특히 남미, 인도, 중동, 아프리카 등 소위 비인기 국가의 전문 인력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 지역 공관장 출신들을 동원할 경우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 제3 세계에 대한 외교력을 강화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전직 외교관들도 이에 동감을 표시한다. ㄴ 전 대사와 ㅇ 전 대사는 “외교관 한 명을 만들기 위해 20~30년 동안 국민 세금을 투자한다. 이런  전문가들이 기업이나 대학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국가 외교력 증진에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ㄱ 전 대사와 ㅇ 전 대사도 “연금만으로도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이 없다. 돈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오해받을까 우려된다. 그러나 평생 쌓은 나의 경험과 외교력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 대가가 없더라도 나라가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에 대해 난감한 반응을 보인다. 외교통상부 이원익 인사운영팀장은 “전직 외교관들의 경험과 인맥을 사장시키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지만 현직 외교 공무원도 남아돌아 퇴직 연령을 낮추고 있는 실정에서 퇴직 인력까지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외교 공무원이 남아돌아도 시시각각 터지는 사건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만한 인력은 그리 많지 않다. 전직 외교관들은 잘못된 인사 정책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ㄱ 전 대사는 “온탕과 냉탕이 있다. 선진국은 온탕이고 후진국은 냉탕이다. 냉탕에서 근무한 외교관을 온탕으로 옮겨주는 선심성 인사 정책도 있다. 그러다 보니 정부나 외교관이 전문성을 확보하기보다는 줄을 잘 서서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려고 눈치를 보는 경향이 있다”라고 털어놓았다.

 
선심성 인사·조기 은퇴 등도 외교력 저하 요인
앞당겨진 외교관의 은퇴 시기도 외교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ㄱ 전 대사는 “최근 65세이던 정년이 60세로 낮춰졌다. 한창 활동할 수 있는 나이에 물러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ㅊ 전 대사와 ㅈ 전 대사는 “덴마크의 외교관 정년은 70세이고 다른 나라들도 정년을 오히려 늘리고 있다. 새로운 인력을 양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 인력을 유용하게 쓸 줄 아는 정부가 되길 바란다”라고 주문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전직 외교관들과의 접촉 창구를 열어놓고 항상 이들을 활용할 채비를 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들이 말하는 창구는 전·현직 외교관 단체인 한국외교협회이다. 외교통상부 이원익 팀장은 “정부는 사안이 있을 때마다 한국외교협회를 통해 전직 외교관들과 만난다”라고 말했다. 한국외교협회 현희강 부회장도 “협회도 협회지를 통해 전직 외교관들의 생각을 개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직 외교관들의 생각은 다르다. ㅊ 전 대사는 “한국외교협회는 전·현직 외교관들의 친목 단체일 뿐이다. 정기적인 정책 토론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전직 외교관이 정책을 정부에 건의하거나 도움을 주는 창구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전직 외교관들을 생산적으로 활용할 다른 방안은 없을까. 많은 전직 외교관들이 ‘싱크탱크(Think tank)’ 구성을 제시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현업에 종사하더라도 유사시에 모여 능력과 경험을 발휘하는 이른바 예비군과 같은 조직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ㅈ 전 대사와 ㅂ 전 대사는 “정부가 못하는 일이 있다. 사건이 터지면 배후나 비선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적지 않다. 여기에는 해당 지역이나 국가에 인맥과 경험이 있는 전직 외교관들이 적격이다. 정부가 싱크탱크를 조직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가동시킨다면 외교력을 배가시키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ㄱ 전 대사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내가 대사로 있던 나라의 IOC위원과 각별한 관계여서 1차 투표 때 로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투표 때는 대사 자리에서 물러난 후여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민간인 신분으로라도 로비를 맡았으면 표를 얻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약소국이나 제3 세계 국가들에 대한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싱크탱크 구성은 필요하다. ㅂ 전 대사는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이다. 미국과 유럽, 러시아 등 주요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이스라엘 전문가는 전무한 실정이다”라고 말했다. ㄱ 전 대사는 “52개 국가가 모여 있는 아프리카에 우리나라 공관은 12곳뿐이다. 한 곳이 몇 개 나라를 관장해야 하는 형편이다. 외교력은 고사하고 전문성을 확보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라고 말했다.
NGO들도 싱크탱크 구성에 찬성한다. 월드비전 이명신 해외사업본부장은 “상시 또는 비상시 시스템을 갖춰 전직 외교관들을 활용하는 방안이 외교력을 높이는 데 바람직하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싱크탱크 같은 조직을 두면 유사시 다양한 전문성과 인맥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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