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 다 비우고 글과 그림 속으로…
  • 조철 기자 ()
  • 승인 2007.09.1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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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 ‘신필’ 뒤에 드러나는 우뚝한 삶과 예술

 

글에는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담겨 있다. 그림에 글씨에 혼을 담아내는 사람도 있다. 예술가들은 작품에 자신을 남긴다. 작품으로 말하는 예술가가 오해를 받기도 하는 것은, 작품 아닌 일들에서 비롯되기 일쑤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신필(神筆)’ 또는 명필로 추사를 기억할 뿐이라면 그만일 텐데, 오해는 왜 하는 것일까. 추사에 대한 오해라는 것은 이렇다. ‘김정희의 증조모는 영조 임금의 따님이고, 증조부는 영조 임금의 사위(월성위)이다. 월성위의 종손인 김정희는 태어나기를 대단한 천재로 태어난 데다, 스물네 살에 아버지를 따라 중국의 연경을 다녀온 당대의 기린아로서, 젊은 날을 내내, 부귀영화를 누리며 보냈다. 그리하여 오만하고 타협할 줄 모른 까닭으로 세상으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아, 오십 대 후반부터 제주도 유배 9년, 북청 유배 2년의 신산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추사>는 나이 일흔을 앞둔 작가 한승원씨가 일흔한 살에 ‘태허 속으로 날아간’ 추사 김정희 선생의 신산한 삶과 예술을 변호하듯 그려낸 소설이다. 달리 말한다면 추사가 오래 묵은 오해를 풀고 자신의 한과 고독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비슷한 나이에 들어선 작가를 택한 것이다. 작가는 운 좋게 자신의 삶까지 반추해가며 추사의 그림과 글씨를 관조할 수 있었다. 오해 너머, 화선지 너머에 숨어서 드러나지 않았던 추사의 생애를 작가는 자신의 생을 추억하듯이 써내려갔다.
작가는 “추사는 실사구시 온고지신 이용후생의 경학, 기굴하고 고졸하고 현묘한 추사체의 글씨, 그림, 난(蘭) 등의 특출한 세계를 성취해낸 삼절(三絶)이기는 했지만, 결코 ‘오만한 천재’는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오히려 순조에서 헌종과 철종으로 이어지던 조선 말기, 왕권이 무너져버린 혼란스럽고 광기 어렸던 시대의 희생자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놀아나는 동안 추사는 북학파의 선구자로 활동하며,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쪽에 서 있었다. 안동 김씨 세력은, 그들의 세력을 강화하고 보존하기 위해 왕권을 무력화시키고 개혁 세력에 대해서는 철저한 응징으로 맞섰다. 그런 그들에게 추사는 누구보다도 눈엣가시였다.
55세 되던 해, 추사는 안동 김씨의 역모로 윤상도의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오랜 벗 조인영의 상소로 죽음만은 면한 채 늙은 몸을 이끌고 제주도로 9년 동안의 긴 유배길을 떠난다.
작가는 “한번 권력을 움켜쥔 자들이 자기 패거리의 권력과 이권을 위하여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해버리는 일은 이 세대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나는 추사의 신필 뒤에 가려져 있는 전혀 또 다른 추사의 얼굴, 잘못 흘러가고 있는 역사를 제대로 흘러가게 하려다가 다친 과정과 유배지에서 분투하는 그를 제대로 드러내주고 싶었다”라며 소설 창작의 의미를 설명한다.

유배 생활에서 꽃피운 예술혼의 극치
북청을 포함한 유배지에서 보낸 추사의 삶은 절대 고독과의 싸움이기도 했으며, 정치가로서 품었던 높은 욕망과의 싸움이기도 했고, 한 인간일 뿐인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추사는 끊임없이 욕망을 버리며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일에만 전념했다.

 
작가는 추사의 빼어난 글씨와 아름다운 그림과 간찰과 시를 관조하며 추사가 살아온 시대의 아픈 역사의 행간을 읽어냈다. 추사의 인간적인 고뇌를 살피는 일을 작가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일처럼 하며, 추사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쳤음을 가슴으로 읽으며 진저리쳤다.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과천 초당에 은거하던 추사. 그는 71세 되던 해 봉은사 초가에서 부처님께 귀의한다. 그곳에서 주지 영기 스님의 요청에 답해 경판각을 저장하는 전각에 걸 현판의 글씨 ‘판전’을 남긴다.
이 소설은 추사 김정희가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된 봉은사 현판의 글씨를 쓰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판전(板殿). 작가는 이 글씨를 두고 “글씨가 시이고, 시가 그림”인 경지, “전서가 해서를 꾀하고, 해서가 예서를 꾀하고, 예서가 행서를 꾀하고, 행서가 초서를 꾀하고, 초서가 다시 모두를 꾀함으로써 새로이 만들어진, 어지러운 헝클어짐 속에서 찾아지는 정돈된 질서”의 경지라고 찬탄한다.
“그 글씨를 보는 순간 하늘에서 무슨 소리인가가 들려왔다. 수백 명의 편경 연주자들과 공후인을 가슴에 안은 비천녀들이 연주하는 음악 같기도 하고, 아스라한 천둥소리 같기도 하고, 두리두둥 두리두우웅 하는 지령음 같기도 한 소리였다. 신필에서는 그러한 신묘한 소리가 난다던 말이 생각났다.”
작가는 천재 예술가로서, 북학파의 선구자로서, 세도 정치와 당당히 맞선 정치가로서, 양자와 서얼 자식을 둔 한스러운 아버지로서 추사의 모습을 다각도로 표현해낸다. 그렇게 해서 오해를 풀겠다는 작가의 집념 또한 진득하게 배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오해를 푸는 일보다 추사의 그림과 글씨를 예사로 보지 않는 계기를 맞을 것 같다.
‘병중작(病中作)’. ‘판전’ 글씨 옆 낙관 위에 작은 글씨로 씌어진 이 세 글자는 보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김정희의 한 평생 또한 ‘병중’이 아니었던가. 열병 또한 병이라면 병이며, 시대의 아픔에 찢겨진 것이 병이며, 질곡의 삶이 병이 아니었을까. 신선이 남긴 것과도 같다는 추사의 작품들은 그의 절대 고독과 고뇌, 좌절과 절망, 분투를 통해 완성되었음을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그에게는 글씨 한 자 쓰는 일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한 돌게 한 돌게의 돌을 깎고 다듬어 쌓아 올리는 석공 아사달의 공덕 같은 것이었다.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심혈을 기울여 한 자 한 자 써오는 글씨는 영혼에 하나하나의 무늬로 각인해가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며 살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각인될 때 그것은 몸속에 보석 같은 사리로 앙금지게 된다. 연금술사들이 새로운 보석 하나하나를 만들어가듯이 시원의 창고 속에 그것들을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다.”
세 음절의 글에도 글쓴이의 영혼이 천년 세월을 이어 살아 있을 것을 안다면, 자판으로 꾹꾹 찍어누르는 글 한 자 한 자에도 긴장을 풀지 못할 듯싶다.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가을 물 같은 문장(秋水文章不染塵)’이 그리운 가을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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