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자본주의와 그 적들
  • 권영준 (경희대 교수·경영학) ()
  • 승인 2007.10.0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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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이제 석 달이 채 남지 않았다.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연말 대선과 남북정상회담 등의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만 큰 관심을 보여왔지만, 국민들은 그런 정치적 사안보다는 먹고 사는 문제와 자녀 교육 문제로 한숨 지며 날을 지샌다. 올해는 우리 역사상 진정한 민주화를 국민들의 힘으로 쟁취한 6월 민주항쟁이 만 20년 되는 해이자, 온 국민을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갔던 외환위기가 발발한 지 꼭 10년 째 되는 해이다. 서민들은 높으신 분들에게 묻는다.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떻게 해야 자기 자식들이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 한시름 덜 수 있는지를. 
유럽의 한 연구소가 조사한 각국의 행복지수에서 우리나라는 조사 대상 95개국 가운데 56위라고 한다. 총 GDP 순위가 12위인 나라가 행복지수는 끝에서 더 가깝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의 경제 운영의 전체 시스템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지난 40여 년 동안 정부 주도형 시장경제를 운영해왔는데, 이제는 개방에 따른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 추세에 따라 양극화가 급격히 진전되어 빈익빈 부익부가 더 극심해지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서민들에게 미래는 없다.
도덕적 엘리트들을 배척하는 사회 구조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해야 하는가? 노무현 정부가 누누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부가 해결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공무원을 더 뽑고 정부 부문을 더 키워야 하는가. 그런데 어째서 참여정부 들어와서 세금을 더 많이 걷고 정부 부문은 커졌지만, 빈부 격차도 더 커졌는가. 기본적으로 정부의 효율성은 시장보다 훨씬 더 낮기 때문에 큰 정부로 서민들을 잘살게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떤 시스템으로 가야 하는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시스템은 정부의 체질적 비효율성을 극복하고 공동체의 발전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 자본주의이다. 공동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장점인 시장지향적 경쟁의 방법을 그대로 활용해 성장을 추구하되, 그 성장의 목적을 공동체의 건전한 발전에 두는 것이다. 경제 체제의 목적이 공동체의 발전이라는 점에서는 사민주의와 동일하나, 공동체 자본주의의 경우에서는 공동체 발전의 정책 수단이 정부의 강제적인 세금 징수가 아니라, 시장 친화적인 투자와 자발적 나눔 운동과 기부 문화에 의존한다는 점이 크게 다르다. 이 경우 사회적 기업들의 역할이 크게 대두되고, 빌 게이츠가 하버드 대학 졸업식에서 주창한 창조적 자본주의 방법에 의해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 및 질병 퇴치에 시장의 도덕적 엘리트가 직접 나서는 자발성과 사회적 풍토 조성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 자본주의를 주도할 수 있는 도덕적 엘리트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지난달 우리 고등법원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 대한 항소심 판결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함으로써 스스로 사법 정의를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해괴한 논리로 국가 경제 발전 운운하는 무식을 드러내는 판결을 감행했다. 하기야 우리 사법부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찬란한 전통을 지켜온 것이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김승연 회장의 조직적 보복 폭행 사건의 판결이나, 두산그룹 총수들의 판결 등을 돌이켜볼 때, 우리나라에 과연 법치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러한 사법부의 판결은 우리 경제를 살릴 공동체 자본주의의 핵심인 도덕적 엘리트들이 형성될 이유가 없는 전례를 만든다는 점에서 판사들의 주장처럼 국가 경제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시키는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진정 국가 경제를 위한다면, 지금이라도 사법부가 자본과 금권으로부터 독립해 선진적 사법 정의를 수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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