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대통령? 꿈도 꾸지마!”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07.10.1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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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임기 말 행보 ‘기세 등등’…퇴임 후 ‘시민 주권운동’도 준비

 
"역대 대통령은 임기 말 ‘뒤뚱거리는 오리’신세였다.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약속이나 한 듯 ‘식물 대통령’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송장’이 된 셈이다. 각종 ‘게이트’로 인해 인기가 떨어진 대통령에게 비정한 정치권은 탈당을 요구했고, 미래 권력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 자체를 견제해 청와대는 사실상 ‘점포 정리’상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라 보인다. 얼마 남지 않은 임기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은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다. 정치권을 향해 혹은 국민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한다.
노대통령은 다음 달 임기가 만료되는 검찰총장과 감사원장 후임을 지난 10월11일 임명했다. 새로 임명된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은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물러날 가능성이 있다. 그럴 경우 재임 기간은 3개월 정도밖에 안 된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의 반발도 예고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이 지명을 강행한 것은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해석된다.
노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던 변양균 전 청와대실장과 정윤재 전 의전비서관의 비리 개입 의혹은 이전 정권들의 임기 말 상황을 연상시킨다. 한나라당은 ‘권력형 비리’의혹을 제기하며 노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 10월 중순부터 열리는 국정감사에서 ‘제대로 한 번 따져보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는 중이다. 의혹이 확산되거나 사실로 드러날 경우 노대통령은 급격한 레임덕(임기 말 권력 누수)에 빠질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남북정상회담 효과로 인해 노대통령의 지지율은 급상승하고 있다. 측근 비리 의혹으로 20%대까지 떨어졌던 지지율은 단박에 50%대까지 치솟았다.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라는 판단으로 ‘인기 없는 대통령’과 거리를 두어왔던 범여권은 머쓱해졌다. 흥행을 기대했던 대통합민주신당의 국민 경선은 난장판이 되었고, 후보들의 지지율은 여전히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발끝에도 못 미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콜드 게임은 고사하고 게임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마저 감지된다. 판을 크게 보는 정치 고수의 훈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 측면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필두로 한 노대통령의 ‘한반도 평화’행보는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범여권에 각성의 계기와 반전의 기회를 동시에 주고 있다.
노대통령은 10월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지난해 11월 김대중도서관 전시실 개관 때 만난 이후 근 1년여 만에 범여권의 양대 축인 전·현직 대통령이 자리를 함께한 것이다. 햇볕 정책의 창시자와 계승자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경제 대통령’을 내세워 난공불락의 성을 쌓고 있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 맞서 효과적인 공성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평화 대통령’이라는 차별화된 무기가 필요하다. 정상회담의 성과들이 후속 조치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햇볕 정책의 효용성이 눈앞에서 증명될 때 대선 이슈는 단순한 경제가 아닌 ‘평화 경제’로 옮아갈 수 있다. 누가 범여권 후보가 되든 그 활용 가치가 상당하다.
두 정치 고수의 회동은 궁지에 몰린 범여권의 상황을 고려할 때 어떤 형식으로든 타개책을 놓고 의견과 교감이 오갈 것이라는 측면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물론 이날 회동은 노대통령이 남북정상 선언 내용과 향후 추진 방향 등을 설명하고, 김 전 대통령의 의견을 듣는 자리였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국내 정치 관련 대화는 전혀 없었다”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고, 박지원 전 비서실장도 “정상회담의 ‘정’자는 나왔지만, 정치의 ‘정’자는 나오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1시간2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선 위기 상황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구체적 방안은 아니더라도 큰 틀에서 모종의 교감은 오갔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동안 범여권 대통합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1 대 1 대결 구도가 국민의 뜻’이라며 통합신당 창당에 힘을 실어주었다. 최근 국민경선이 파행을 거듭하자 ‘경선 판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뜻을 한명숙 전 총리를 통해 이해찬 후보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미국 방문 중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을 범여권 후보 단일화의 대상 중 한 명으로 언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후보 단일화 논의는 10월 중순 범여권 정당들의 후보가 결정된 후 본격적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당장 통합신당과 민주당 후보 그리고 문국현 전 사장 등이 단일화 방안을 놓고 힘겨루기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문 전 사장은 11월 초 신당 창당을 목표로 준비 중에 있으며, 범여권의 상당수 인사들이 창당 전후에 합류할 것으로 알려졌다. ‘노심(盧心)’의 향배는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도 주요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대선과 관련해 “어느 쪽이 이겼으면 하는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아주 솔직히 말씀드리면, 원칙이 없는 기회주의자들의 싸움에 별 관심이 없다”라고 밝혔다.

청와대, ‘퇴임 후 활동’ 연구 한창
노대통령이 대선 정국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식은 이전 정권들의 그것과는 달라 보인다. 과거 대통령들이 선거운동 자체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면, 노대통령은 말과 글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방식으로 상대편 후보를 공격한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 대한 비판이 대표적이다.
남북정상회담 전후로 잠잠했던 청와대의 이후보에 대한 공세가 재가동되기 시작했다. 천호선 대변인은 지난 10월10일 정례 브리핑에서 “평준화 정책을 흔드는 교육 정책은 물론이고 이후보의 부동산 정책, 균형발전 정책에 대한 입장, 대운하 정책 등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고 혼란을 초래할 위험을 안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노대통령은 이미 여러 차례 이후보의 정책과 도덕성 등을 문제 삼았다. 노대통령은 9월17일 지역 균형발전과 관련한 이후보의 공약을 겨냥해 “수도권의 용적률을 높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도를 봤다. 이 무슨 망발인가. 수도권의 용적률을 높이면 지방민들의 문제가 해결이 되나”라고 따졌다. 앞서 같은 달 11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는 “아무리 유능한 이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원칙을 존중하지 않고 짓밟으며 정권을 잡으면 국가 발전과 국민 행복, 역사 발전에 기여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노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형성되고 있는 평화 이슈를 주도하는 한편 이후보에 대한 비판 공세도 강화하면서 대선 정국에서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의 ‘대선 역할론’은 ‘퇴임 후 구상’과도 맞닿아 있다. 그동안 노대통령이 퇴임 후 무슨 일을 할 것이냐를 놓고 갖가지 추측들이 쏟아졌다. 지역 정치를 할 것이라는 소문에서부터 농촌 복원운동을 펼칠 것이라는 전망까지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최근 상황을 종합해보면 노대통령은 퇴임 후 ‘시민 주권운동’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시민 주권운동은 ‘모든 시민은 지도자’를 목표로 선거를 통한 일회성 정치가 아닌 시민이 직접 권리를 찾는 생활 정치를 실현하자는 운동이다. 노대통령은 지난 6월28일 ‘세계시민기자포럼 개회식’에 보낸 축하 영상 메시지에서 “임기를 마치면 시민 주권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할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한 정치권 인사에 따르면 시민 주권운동을 하겠다는 노대통령의 생각은 확고하며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이냐에 대한 결정만 남았다고 한다. 청와대 내에서도 시민 주권운동에 대한 연구와 함께 이를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참여정부평가포럼’(참평포럼) 등에서도 관련한 논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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