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정상화, 남북 선언 이행…북한은 속이 탄다
  • 고유환 (동국대 교수·북한학) (sisa@sisapress.com)
  • 승인 2007.12.1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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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을 남측에 보내고 총리 회담 등 남북 접촉에 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연말 한반도 정세는 한파를 물리칠 만큼 다양한 행사로 달아오르고 있다. 국내 정치는 대선이 본격화하면서 대한민국의 5년을 좌우할 후보들 간의 경쟁으로 뜨겁다. 남북 관계 측면에서는 총리회담과 국방장관회담이 열린 데 이어 북한의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일행이 2007 남북정상회담의 10·4 선언 이행을 촉진하기 위해 남측을 방문하고 돌아갔다. 또한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가 12월4일부터 6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와 같이 노무현 정부 임기 말 남북 관계 발전을 제도화하기 위한 움직임이 발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북핵 6자회담 관련 당사국들을 연이어 방문하고 있다. 북핵 불능화를 목표로 한 2·13 합의의 연내 이행과 함께 있을 3단계 협상을 준비하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12월3일부터 5일까지 평양을 방문했던 힐 차관보는 박의춘 외무상을 만나 부시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고든 존드로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12월6일 브리핑에서 “부시 대통령이 지난 토요일(1일) 북핵 6자회담 참여국 지도자 모두에게 서한을 보냈다”라고 밝혔다. 존드로 대변인은 또 “부시 대통령은 이 서한에서 북핵 6자회담에 대한 우리의 약속을 거듭 확인하고 지난 2005년 합의대로 북한이 ‘충분하고도 완전한 핵 프로그램 신고(full and complete declaration of their nuclear programs)’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라고 말했다.
북한 핵실험 이전만 해도 북한과 양자협상 자체를 거부했던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친서를 전달한 것은 격세지감이다. 지난 3월 초 뉴욕에서 북·미 관계 정상화 회담이 열렸을 때 김계관 북한 부상이 체제 안전 보장의 징표로 부시 대통령의 친서 전달과 함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을 특사로 지명해 방북해달라는 뜻을 전달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그런 미국이 부시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북핵 해결을 서두르는 것은 핵 확산의 오명을 벗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진 부시대통령이 북핵 해결을 외교 업적으로 삼고자 한다면 북핵 문제 해결은 급진전할 수 있다.  
예정대로 연내 북핵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의 신고가 이루어지면 모든 핵 프로그램과 핵물질 및 핵무기 폐기를 위한 협상을 본격화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쟁점은 북한측이 모든 핵 프로그램과 핵물질을 성실히 신고하는 문제와 미국이 테러지원국 명단을 삭제하는 문제이다. 이는 동시 행동원칙에 따라 해결되어야 한다. 말 대 말(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은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 이행의 기본 원칙이다. 2·13 합의 이행으로 핵물질이 늘어나는 것을 막는 급한 불은 껐지만 비핵화를 위한 협상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줄다리기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많지 않다. 남측에서는 대선이 진행 중이고, 미국에서도 대선 캠페인이 한창이다.
남측의 대선에 따른 상황 변화 등 불확실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북측은 정상회담과 총리회담 등에서 많은 합의를 이루고 이의 이행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경제협력공동위원회 등 실무회담도 서두르고 있다. 북측은 남측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크게 영향 받지 않고 남북 관계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임기 말 이러한 남과 북의 발 빠른 움직임에 대해 차기 정부에 부담을 주는 ‘남북 관계의 대못질’이라고 비난하는 측도 있지만 한반도 정세는 그렇게 녹록치 않다. 연내 북핵 불능화가 이루어지면 북·미 양자회담과 6자회담 등을 통해서 북핵 폐기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큰 틀의 협상이 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대선 등 국내 정치에만 몰두할 수 없는 것이다.
 

정권 바뀌어도 남북 관계 변하는 것 원하지 않아

다행히 노무현 정부 임기 말임에도 불구하고 권력 누수 없이 남북 관계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한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의 대부분은 새 정부가 그대로 이행해도 좋은 내용들이다. 북측이 임기 말의 남측 정부와 많은 합의를 모색하는 것은 정권 교체 이후 남북 관계 재설정에 관한 우려가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서명한 6·15선언과 10·4 선언은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지도자 중심의 유일 체제를 운영하고 있는 북한의 내부 논리이다. 남측의 새 정부가 이 두 합의를 사문화하지 않을까를 우려하는 것이다. 이 두 합의를 파기하게 되면 김정일 지도자의 리더십도 손상될 수밖에 없다. 대남 총책인 김양건 통전부장이 남측을 방문한 것도 이러한 우려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부장이 남측의 각계인사를 만나 남북 공동 번영의 새 시대를 열자고 강조하는 것도 남측의 정권 교체에 관계 없이 남북 합의를 잘 이행하면서 공동 번영을 이룩하자는 의도일 것이다.
북한은 한국의 정권 교체기에서 공백을 줄이면서 남북 관계 발전을 가속화하기 위해 전례 없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과거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학습 효과의 결과이다. 북한은 남북 화해와 서방과의 대타협을 통한 국제 사회로의 편입을 위한 노력을 1994년과 2000년 등 두 차례 시도했다. 1994년의 노력은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무산되었다. 2000년의 노력은 남북 화해에는 성공했지만 북·미 적대 관계 해소를 통한 북한의 국제 사회 편입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으로 무산되었다. 클린턴 행정부와의 관계 정상화 마지막 단계에서 이를 마무리하지 못해 원점으로 돌아가고 핵실험에까지 이르렀다. 부시 대통령 재임 기간 북·미 갈등, 한·미 간의 대북 정책을 둘러싼 갈등, 북핵 실험 등으로 한반도 정세는 긴장 국면을 지속했다. 북한이 핵실험이라는 충격요법을 통한 국면 전환에 성공함으로써 한반도 정세는 급변하고 있다. 북한은 북·미 적대 관계 해소를 위한 ‘전략적 결단’을 재확인하고 북핵 불능화와 함께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를 동시 행동차원에서 이행하는 데 합의했다.
잃어버린 10여 년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북한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출발이 늦었다. 장애물도 곳곳에 놓여 있다. 늦은 출발을 만회할 수 있는 지름길은 북핵폐기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3단계 협상을 ‘통이 크게’ 진행하는 것이다. 그 첫 관문은 ‘종전을 위한 선언’이다. 이 문을 먼저 열어야 북핵 폐기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북·미 관계 정상화를 촉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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