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의 감각으로 주류를 호령하다
  • 김유미 (연극평론가) ()
  • 승인 2007.12.10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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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서 잘나가는 연출가’ 박근형의 인기 비결

 
박근형은 속된 말로 대학로에서 잘 나가는 연출가이다. 올해 그가 관여한 작품을 보면 인기리에 재공연되었던 <경숙이, 경숙 아버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었던 <필로우맨>, 게릴라 극장에서의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 뮤지컬 <위대한 캐츠비> 그리고 최근작 <백무동에서>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감각을 뽐낸다. 그렇지만 모든 작품이 성공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박근형의 작품은 편차가 많이 느껴진다. 특히 박근형 작·연출인 경우 어떤 작품은 너무 비주류의 감각이라서 단순한 내용을 괴기스럽게까지 표현하는 등 그 과도함에 막막해지기도 한다. 주류 연출가에게서 비주류적 극단을 보는 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놀라움을 동반한다. 박근형은 항상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박근형의 장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좀더 편안해진 표현 속에서 날선 감각이 살아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의 절실함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난이도가 <청춘예찬>이나 <경숙이, 경숙 아버지> 정도라면 딱 좋겠다.
<필로우맨>은 처음에 외국 원작을 대형 무대에서 유명 배우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점에서 박근형의 색깔과 거리가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윤제문이라는 박근형표 배우이자 극단 ‘골목길’의 골수 배우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과연 깔끔한 기성복 체질이 아닌 그가 이런 작품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그러나 작품을 보고 나서는 이 작품에 대해 오해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작품은 원작자 마틴 맥도너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났는데, 비주류 감각을 가진 작가가 주류 평단에서 인정받지 못하자 승부수를 띄우면서 주류 평단을 비꼬는 의미로 쓴 것이기 때문이다. 대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맥도너와 박근형은 닮은 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필로우맨>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연출보다는 배우(최민식, 윤제문, 최정우, 김대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탓에 박근형의 고유함이 덜 부각되기도 했다.
뮤지컬 <위대한 캐츠비>의 경우에도 좀 예외적이다 싶었다. 이 작품에서는 사실 기존의 연극에서 보여주었던 박근형적인 느낌이 전혀 살아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뮤지컬 작품은 비교적 깔끔하게 나왔지만 박근형이라는 연출의 힘이 별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뮤지컬이라는 형식 속에서 예의 그 의뭉스러움과 아이러니를 발휘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에 이르면 다시 신인이 된 것 같은 느낌으로 비주류적 감성을 마구 발휘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은 박근형의 작품을 보아온 사람이라면 그다지 낯설게 느끼지 않을 만한 실험이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편안한 듯 하면서 전혀 편안하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객을 그 균열감 속에서 헤매게 한다. 최근 아르코 소극장 기획 공연으로 올라간 <백무동에서>는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와 같은 균열감 때문은 아닌데 너무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다 보니 초점이 흐려져서 관객들은 혼란을 겪게 된다. 상징과 비유가 이쪽으로도 뻗고 저쪽으로도 뻗어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의 경우 그 어떤 긴장감이 연출가의 과도한 실험 속에서도 관객들을 집중시키고 박근형만의 비주류적 컬트의 세계에 빠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도 알 수 없는 비주류의 매력을 경험하게 된다. 

‘기성’ 거부하는 자유로움이 가장 큰 매력

박근형 연극의 가장 큰 매력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로움이다. 그 자유로움은 기성의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그는 기성의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 엄청 돌려 말한다. 이것이 박근형적 어법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그 자유로움은 진지함과 가벼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차가움과 뜨거움, 우아함과 욕설의 기가 막힌 조화 덕분이다. 물론 그것이 어떤 작품에서는 균열로 다가오는데 그것은 한 끗 차이이다.

 

<백무동에서>는 어떻게 보면 <청춘예찬>의 국가 버전이기도 하다. <청춘예찬>이 웃기는 한 집안의 이야기였다면 <백무동에서>는 웃기는 한 나라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청춘예찬>에서는 조야하게 빛나는 야광별로 결론을 대신했지만 <백무동에서>에는 조잡하지만 무한히 따스했던 야광별이 보이지 않는다.
<백무동에서>가 얼마나 웃긴 얘기냐 하면 이 마을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이를 낳는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누구나 아이를 낳는다. 이 왕성한 생산력은 칭찬할 만하지만 그들은 낳기만 할 뿐 태어난 아이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많은 만큼 함부로 다루어지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리고는 또 아이를 낳는다. 그러면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극에 달하는 것은 그들이 귀하게 여기는 유학 갔던 손주가 마중 나간 친구들과 돌아오면서 결국 그들 할아버지들의 총에 맞아 죽게 되는 마지막 부분이다. 그 할아버지들 중의 하나인 윤제문은 그때 아이를 낳는 중이었는데, 한 손주가 태어나면서 다른 손주가 죽는 상황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잘 요약해준다.
 결국 우리는 자손을 죽이기 위해 자손을 낳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자손의 번창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지만 결국 우리가 하는 행위는 자손을 죽이고 마을을 훼손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이 작품은 기성 세대의 꿈이 완전 개꿈임을, 그들의 우아한 보수주의의 허상이 어떤 것인지를 꽤 충격적으로 전달한다. 그런데 그 충격이 즉각적이지 않은 것은 교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박근형 연극의 최대 강점이다. 그런데 가슴이 아픈 것은 젊은 세대들에게 꿈이 없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를 대변한 배우 주인영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청춘예찬>에서의 야광별이 이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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