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집’ 주고 ‘새집’ 값 받는 노트북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 승인 2007.12.24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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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포장 다시 해 중고를 신품으로 바꿔치기 대기업 대리점에서도 자행돼 ‘못 믿을’ 상혼

 
반품된 노트북 컴퓨터가 새 제품으로 둔갑되어 팔리고 있다. 여기에는 교환·환불 등으로 인한 반품이나 진열품을 박스에 다시 넣는 이른바 ‘리박싱’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방법이 교묘해서 노트북에 대해 잘 모르는 노인이나 여성의 피해가 적지 않다. 피해 사실을 호소하면 유통사와 제조사가 서로 책임을 떠넘겨 소비자만 골탕을 먹고 있다.
회사원 유지연씨(30·여)는 지난 9월 서울 테크노마트의 노트북 전문점에서 LG노트북 한 대를 1백40만원에 샀다. 집에 돌아와 살펴보던 중 6개월 전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넷마블’이라는 폴더를 발견했다. 이 폴더는 온라인 게임 프로그램을 깔 때 생기는 것으로 새 노트북에는 없어야 정상이다. 유씨는 판매점 측에 항의해 새 노트북으로 바꿨지만 그 노트북도 LCD패널에 이상이 생겨 결국 환불받았다. 유씨는 “누군가 썼던 것을 새것인 것처럼 팔았다. 박스 윗부분에는 새 제품임을 증명하는 봉인라벨까지 붙어 있어 믿고 샀는데 중고품이라니 어이가 없다. 결국 LG전자 대리점에서 새로 샀지만, 100만원이 넘는 대기업 제품을 사면서 이렇게 마음고생이 심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이상이 발견된 노트북은 제조사로 보내져 반품 처리된다. 소비자의 마음이 달라져 반품한 제품이나 매장에 전시했던 진열품도 반품 처리 대상이다. 일단 박스의 봉인 라벨이 뜯어지면 중고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제품은 보통 제조사의 사내 판매용 등으로 활용된다. 또 ‘리퍼비시(Refurbished)’ 제품이라고 해서 본래 가격보다 할인되어서 팔리는 것이 정상이다.

신제품에 게임 프로그램 깔려 있어 반품 요구도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한 번 다른 사람의 손을 탄 노트북이 새 박스에 담겨 새 제품인 양 팔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박스 포장을 다시 한다고 해서 이를 ‘리박싱’이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소비자 항의가 늘자 일부 제조사들은 공장 출하시 박스 개봉 부분에 봉인 라벨을 붙인다. 그러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봉인 라벨에 헤어드라이기 등으로 열을 가해 흠집 없이 떼었다가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한 번 뗀 봉인 라벨에서 안 보이던 글자가 나타나도록 특수 제작된 것도 나왔다. LG노트북 박스의 경우 평범한 백색 봉인 라벨처럼 보이지만 떼어내면 ‘VOID(무효)’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봉인 라벨이 있다고 해서 새 제품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봉인이 되어 있지 않은 박스 밑부분으로 노트북을 꺼내는 등 교묘한 수법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지난 12월18일 서울 용산 전자상가. 한 노트북 판매점의 직원이 노트북 박스를 조심스레 정리하고 있었다. 노트북을 팔고 남은 빈 박스라고 했다. 그 박스들은 윗부분이 아니라 아랫부분이 개봉되어 있었다. 이곳뿐만 아니라 서초동에 있는 국제전자상가와 구의동에 있는 테크노마트 등에 있는 노트북 판매점마다 박스가 쌓여 있다. 취재진이 노트북을 사려 하자 그 직원은 재고가 없다면서 “다른 곳에서 노트북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택배로 보내줄 수도 있다”라고 했다. 이 경우 리박싱 제품인지 아닌지 소비자로서는 확인할 방도가 없다. 그 직원은 “박스를 쌓아둔 집(판매점)이 많다. 겉으로 재고가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시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쓰레기로 처리해야 할 박스가 왜 필요한 것일까. 삼성전자 대리점인 디지털프라자 관계자는 “일부 판매점들이 리박싱하기 위해 박스를 버리지 않는다. 리박싱 제품은 공장에서 출고된 것을 변형한 것이므로 새 제품이 아니다. 그런데도 새 제품인 양 버젓이 팔고 있는 곳이 많다”라고 말했다.
노트북을 살 때 소비자들은 필요한 프로그램이 있느냐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 본래 노트북에 깔려 있지 않은 프로그램을 서비스 차원에서 깔아주겠다니 마다할 소비자가 없다. 또 메모리칩을 업그레이드할 것을 권유받기도 한다. 노트북을 꺼내기 위해 박스를 개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때 판매점은 어차피 버릴 박스를 대신 처리해주겠다는 선심성 말투로 박스를 받아 챙긴다. 이렇게 확보된 박스들이 리박싱용으로 활용된다.
리박싱으로 인한 피해가 늘면서 소비자들 사이에 속칭 ‘리박싱 주의보’까지 떠돌고 있다. 특히 봉인 라벨이 없는 박스 밑부분이 헐겁거나 구겨진 것은 리박싱으로 의심해보아야 한다. 또 본래 박스에는 없는 투명 테이프로 박스 밑부분을 임의로 봉인한 제품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뜯어낸 봉인 라벨 위에 또 다른 봉인 라벨이 이중으로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또 박스 개봉 후에는 노트북 본체와 박스의 시리얼 번호(S/N)가 같은지 확인해야 한다.
새 노트북 전원을 켜면 반드시 등록이나 파티션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부팅된다면 리박싱 제품일 가능성이 크다. 하드디스크 용량을 나누는 파티션 과정은 최초 1회만 실행되기 때문이다. 혹시 등록 과정에 이미 등록된 제품이라는 문구가 나오면 누군가 이미 그 제품을 썼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문제에 신경을 쓰기 싫거나 노트북에 대해 잘 모르는 소비자들은 대기업 제조사 간판이 붙은 대리점이나 유명 유통 매장을 찾는다. 그러나 이런 매장도 안심할 수는 없다.
대학생 성지우씨(27·가명)는 최근 삼성전자 대리점인 디지털플라자에서 노트북을 샀다. 대리점 직원은 “재고가 없으니 공장에서 바로 출고되는 제품을 택배로 보내주겠다”라고 했다. 성씨는 며칠 후 받아본 노트북 박스 아랫부분이 구겨져 있었고 노트북에 지문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환불받았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 삼성의 디지털프라자나 LG의 하이프라자는 물론 하이마트 등 유명 유통 업체에서 구입한 제품 가운데도 리박싱된 것이 있다”라고 말했다.

유통사와 제조사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유통사와 제조사들도 리박싱 제품이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쉬쉬하고 있다. 가전제품 유통사인 하이마트 관계자는 “소비자가 제품을 보자고 하면 현장에서 박스를 개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비자가 사지 않을 경우, 하자가 없는 제품을 반품 처리할 수도 없다. 제품에 하자가 없는 것인데 불량품으로 볼 수 없지 않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런데 하아마트측은 취재진에게 다시 연락해와 “조금 전 다른 직원이 모르고 잘못 말한 것이다. 박스를 개봉한 제품은 반품 처리한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노트북 제조사인 LG전자의 박승구 차장은 “리박싱이라는 말은 금시초문이다”라고 말했다. 제조사가 박스에 봉인 라벨을 붙이는 이유를 따져 묻자 “리박싱은 알고 있는데, 유통사가 박스를 어떻게 마련하고 봉인 라벨을 따로 만드는지 구체적인 방법은 모른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제조사들은 박스를 개봉한 제품은 반품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유통사들은 웬만하면 반품시키지 않는다. 반품을 시키면 매출에 손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유통사 관계자는 “반품시키려면 절차도 복잡하고 설사 반품시켰다고 하더라도 새 제품이 올 때까지 한 달 이상 걸린다. 그 기간 동안 제품을 팔지 못해 매출 손실이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유통사들은 겉으로 봐서 이상이 없는 제품은 리박싱 수법을 통해 다시 판다는 것이다.
유통사와 제조사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사이 소비자만 골탕을 먹는다. 중고품을 비싼 가격에 사는 것은 물론이고 어떻게 해서 리박싱 제품인 것을 알았다 해도 처리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리박싱 제품이라는 것을 소비자가 증명해야 한다. 또 유통사가 반품을 받아 주더라도 소비자는 새 제품이 올 때까지 한없이 기다려야 한다. 김수민씨(57)는 “제품을 팔 때는 당장 팔면서 교환할 때는 새 제품이 올 때까지 무한정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노트북뿐만 아니라 휴대전화, 심지어 자동차까지 중고품이 새 제품으로 둔갑한다. 유통사와 제조사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일단 팔고 보자는 식의 상술에 매달리다 보니 소비자 피해만 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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