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조원짜리 숨바꼭질, 지독하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 승인 2008.01.0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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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상습 체납자 갈수록 증가…수법 교묘해 숨긴 재산 찾기도 ‘한계’

 
재산을 요리저리 빼돌려 세금을 내지 않는 악성 고액·상습 체납자들이 늘고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고액·상습 체납자 3천46명이 13조9천7백43억원의 국세를 내지 않았다. 이는 우리나라가 지난해 물건을 팔아 번 무역수지 흑자 추정치 1백50억 달러(약 14조원)와 비슷한 규모이다. 1명당 46억원 꼴이다. 2004년 1천여 명이 4조6천억원의 세금을 내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3년 새 3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그럼에도 고액·상습 체납자들로부터 세금을 받아낼 수 있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대부분 2년 이상 장기 체납자인 데다 재산 은닉 수법도 날로 교묘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체납 규모 3년 새 3배 이상 증가

국세 기본법에 따라 국세청은 지난해 11월 체납일로부터 2년이 지나고 체납 국세가 10억원 이상인 체납자 명단을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했다. 2004년에 이어 네 번째이다. 그동안 체납자 공개로 매년 신규 체납자 수는 줄어들었다. 국세청 구돈회 징세과장은 “2005년 1천1백60명이던 신규 체납자 수는 2006년 7백4명, 2007년 6백61명으로 줄었다. 명단 공개로 개인과 기업 이미지 하락 등에 따른 체납 발생 억제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전체 체납자 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신규 체납자는 줄어들고 있지만 기존 체납자들이 계속 누적되기 때문이다. 2004년 1천1백1명이던 체납자 수는 2천1백35명(2005년), 2천6백36명(2006년), 3천46명(2007년)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체납액도 2004년 4조6천만원에서 9조2천만원(2005년), 11조원(2006년), 13조9천억원(2007년)으로 매년 크게 늘었다.
지방세 체납도 줄어들지 않았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해 1천4백96명의 고액·상습 체납자가 모두 4천6백30억원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 2006년에 비해 체납자 수는 3백명 이상, 체납액도 약 1천억원이 증가한 것이다. 국세청 구돈회 징세과장은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매년 누적되는 사람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금 징수 시효가 소멸되면서 점차 줄어들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말대로라면 지난해 체납된 국세 13조9천억원은 걷지 못할 수도 있다. 서울시 재무국 최홍대 세무과장은 “세금이 부과되면 납세자 중 98%는 성실히 납부하지만 나머지 2%가 체납한다. 이들 중 76%는 파산 등으로 돈이 없어 납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납부 능력이 되면서도 교묘히 재산을 은닉하는 고질 체납자이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들의 체납된 세금을 징수하고 있다. 그러나 수법이 교묘해 은닉 재산을 찾아내기가 점점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체납자의 은닉 재산은 대부분 부동산이다. 체납자가 동산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을 뿐더러 동산을 처분해도 체납액을 해결하기에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은닉 재산으로 확인되어 압류된 체납자의 부동산은 한국자산관리공사 등을 통해 공매 처리된다. 2006년 한국자산관리공사 공매에 나온 주택과 아파트 건수는 모두 1만여 건. 이 중 낙찰된 것은 1천8백건, 1천5백억원 규모이다. 문제는 공매를 통한 입찰 물건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3분기 입찰 물건 수는 1천4백89건으로 전년 동기(3천2백2건) 대비 절반 이하로 줄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이선영 주임은 “압류된 부동산에 대한 공매 의뢰가 국세청과 서울시 등으로부터 접수된다. 지난해 3분기까지 입찰 물건 수는 4천5백여 건이었는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절반 정도 줄어든 규모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은닉 재산을 찾아내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대구시에서 유명백화점을 운영했던 나 아무개씨(53)는 지난 3년 동안 모두 4억7천여 만원의 세금을 체납했다. 그는 서울 강북에 있는 2백30㎡(70여 평) 규모의 수십억원짜리 집을 경매로 부하 직원에게 넘기고, 나씨 아들이 이를 다시 구입하는 수법을 썼다. 체납자가 재산을 교묘히 빼돌린 것이라는 심증은 있지만 은닉한 것이라는 물증이 없어 애를 먹고 있는 경우이다. 또 20억원을 체납한 서 아무개씨(62)는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위장 이혼까지 했다. 서씨는 부인 박 아무개씨와 이혼한 2001년 이후 빈번히 외국에 갔다 왔다. 서울시는 서씨의 출입국 일자가 이혼한 처의 출입국 일자와 거의 일치한 점에 주목했다. 추적 결과 서씨는 대부분의 부동산을 이혼한 처 명의로 돌려놓았다. 부인 박씨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소재 약 1백32㎡ 아파트, 서울 강동구와 경기도 용인시 소재 1백65㎡의 아파트 등을 최근 매도했다. 또 서씨의 아들과 사위 등 친인척들도 빈번하게 출입국한 사실이 있는 점을 파악한 서울시는 서씨가 처와 친인척 등을 이용해, 은닉한 재산을 해외로 옮기고 도피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검찰을 통해 서씨를 출국금지 조치하도록 했다.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한 교묘한 수법이 등장하면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방법도 다양하게 동원되고 있다. 악성 체납자로 낙인이 찍히면 금융 활동과 출입국에 제한을 받는다. 서울시는 5백만원 이상 체납자에 대해서는 체납 사실을 금융기관에 통보해 대출 등 금융 거래에 불이익을 준다. 또 3회 이상 체납자가 음식점이나 숙박업 등의 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허가를 취소한다. 5천만원 고액 체납자에 대해서는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출국금지를 요청해 해외 도피를 봉쇄하고, 3회 이상 체납할 경우에는 사법기관에 고발한다.

체납의 근원부터 체계적으로 분석·관리하는 시스템 있어야

은닉 재산 확보에는 무엇보다 끈질긴 재산 추적이 효과적이다. 13년 동안 추적해 세금을 징수한 경우도 있다. 지난 1994년 주민세와 자동차세 등 무려 33건에 모두 7천3백만원을 체납한 김 아무개씨(49)는 거주지가 월세방이었고 체납자 명의로 된 재산도 전혀 없어 사실상 세금을 낼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배우자가 근저당설정 등으로 사실상 수천만원대 채권을 보유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세금을 징수했다. 김씨는 지난해 2천5백만원을 납부했고 2008년까지 전액 납부하겠다는 납부 계획서를 서울시에 제출했다.
2006년부터는 은닉 재산 신고 제도까지 도입되었다. 일반인이 체납자의 은닉 재산을 신고할 경우 포상금을 주어 체납 징수를 활성화할 목적이다. 2006년 4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국세청에 접수된 신고 건수는 1백18건. 이 중 1백79건은 처리 완료되었고 9건은 처리 중이다. 포상금은 징수 금액에 따라 체납액의 2~5%이며 최대 1억원까지 지급된다. 국체청은 “국민의 신고로 44억원의 현금 징수를 할 수 있었다. 세무 기관이 체납자의 은닉 재산을 추적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는 만큼 국민의 신고가 절실하다”라며 납세자의 은닉 재산 신고를 독려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도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고액·상습 체납자로 공개된 체납자가 해를 거듭해도 공개 명단에서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세연구원 김형준 박사는 “체납 관련 업무를 민간 기관에 위탁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논의되어왔지만 뚜렷한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다만 체납의 근원부터 체계적으로 분석·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할 필요는 있다. 예를 들어 사업체가 도산한 경우 체납액 징수는 거의 어렵다. 그러나 고의로 부도를 내고 사주는 배불리 잘 사는 경우가 있는 만큼 사업체 도산의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것도 고려해볼 만한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차명계좌도 체납된 세금 징수에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체납자의 재산이 차명계좌를 통해 은닉된 경우 체납자의 재산임을 증명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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