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끈 다시 매는 ‘그때 그 사람들’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 승인 2008.01.1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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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동·동교동 인사들, 총선 앞두고 ‘기지개’…YS·DJ 영향력 약해져 전망은 회의적

 
"숨쉬는 것조차 정치이고 잠을 자면서도 정치를 할 사람들이다.” 최근 사석에서 이인제 민주당 의원이 김영삼(YS)·김대중(DJ) 두 전직 대통령을 평가하면서 한 말이다. ‘정치 9단’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현역에서 물러나 있으면서도 현실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한국 정치사에서 YS와 DJ는 늘 비교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민주화를 이끌어온 동반자였지만 대권을 놓고 오랜 기간 대결을 펼쳐온 경쟁자이기도 했다. 각각 ‘상도동’과 ‘동교동’으로 불리는 계파를 거느리며 한국 정치를 주도해오다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이후 그 영향력이 조금씩 옅어졌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상도동과 동교동이 또다시 분주해지고 있다. 한때 권력의 중심에 섰던 ‘그때 그 사람들’이 정계 복귀를 꿈꾸며 총선 무대로 올라설 준비에 한창이다. 계보 정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적지 않지만 대선을 통해 불거져나온 변화의 요구가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정계 복귀 움직임을 활발하게 만들고 있다.
YS의 상도동이 대선 바람을 타고 들썩이고 있다. 그가 이명박 당선인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압승을 거두는 데 일조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YS는 1992년 신한국당 대표 재임 시절 전문경영인인 이당선인을 전국구 공천을 통해 정계에 입문시켰다. 이당선인에게 있어 YS는 사실상 ‘정치적 스승’인 셈이다.

 
대선 통해 나온 변화 욕구가 오히려 호재로

지난 1월1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YS의 팔순 잔치는 변화한 그의 입지를 잘 보여주었다. 1997년 대선 패배 이후 특별한 구심 없이 각개 약진해왔던 상도동 인사들이 10년 만의 정권 교체를 맞아 성대한 잔치상을 마련한 것이다.
준비위원회까지 꾸려서 행사를 준비했다. YS의 비서를 지낸 김수한·박관용 전 국회의장과 김덕룡 의원이 공동 초청인, 김무성 의원과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이 집행위원을 맡았다. 생일 행사에서는 YS의 정치 역정을 담은 15분짜리 영상물이 상영되기도 했다. 옛 통일민주당 국장 이상 당료 출신 모임인 ‘민주동우회’도 1월14일 한 자리에 모인다. YS의 팔순 잔치와 신년회를 겸한 모임이다. YS를 구심으로 한 각종 행사가 줄을 잇자 이번 정권 교체가 상도동 인사들에게 지난 10년간의 칩거를 털어버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앞서 새해 첫날 이른 새벽부터 상도동 자택에서 세배 손님을 맞이한 YS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제대로 하지 못해서 나라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이번에는 여소야대의 상황으로 가지 않으리라고 본다”라며 총선에서도 한나라당 압승을 예상했다. 명맥만 유지해온 상도동 계보 정치도 다가온 총선을 통해 되살아날 기회를 잡았다. 우선 YS의 가신으로 불리는 박종웅 전 의원이 부산 사하구에서 출마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박 전 의원은 이번 대선에서 ‘민주연대21’이라는 조직을 이끌며 이명박 당선인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그의 사무실 앞에서 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펼치기도 했다.
YS의 차남인 김현철 거제미래발전연구소 소장도 경남 거제에서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17대 총선에서 중도 하차했던 김소장은 이번에는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 공천 경쟁에 나서겠다”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어 공천을 놓고 이 지역 3선 중진인 김기춘 의원과 마찰이 예상된다. 한나라당 경남도당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의원은 지난해 대선 후보 경선 때 박근혜 전 대표를 밀었다.

 
양쪽 모두 구성원 떠나거나 경쟁 상대로 변해 응집력 떨어져

DJ도 이달에 생일을 맞았다. 84회 생일을 맞은 지난 1월6일 그는 서울 시내 모처에서 비서실, 경호실, 김대중 도서관 직원들과 함께 생일 잔치를 가졌다. 전날에는 가족들과 점심식사를 하며 조촐하게 보냈다. 별도로 정치권 인사의 방문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난해 생일 때 동교동 자택에 축하객이 몰려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것과 대조된다.
대통합민주신당 지도부의 새해 인사를 받는 자리에서 그는 ‘위기 상황’을 언급했다. DJ는 “내가 정치를 한 반세기 동안 민주개혁 세력이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진 것은 처음이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민주주의에 상당한 적신호가 온다”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민주개혁 세력이 반성과 시정의 기미를 안 보이면 다시 한 번 국민이 무서운 채찍을 내릴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DJ의 정치적 영향력이 대선 패배 이후 예전만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개혁 세력의 단결을 강조하며 대통합을 주문했지만 각 정파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통합신당과 민주당, 창조한국당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선거를 치렀고 그 결과는 예상대로 참패였다.
이와 별개로 동교동 인사들의 정계 복귀 작업은 가시화하고 있다. 지난해 말 사면·복권된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와 DJ의 최측근인 박지원 비서실장의 정치 행보에 속도가 붙었다. 두 사람 모두 전남 목포를 출마지로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져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한화갑 전 대표는 1월7일 평화방송에 출연해 ‘목포 출마’를 언급하면서 “우리에게도 질서가 있고 선배가 있다. 박실장은 광주 남구, 해남·진도 이야기가 있던데 구태여 같은 지역에 와서 그렇게 할 이유가 있겠느냐”라며 미리 차단막을 쳤다.
이와 함께 김한길 통합신당 의원이 정계 은퇴를 선언해 ‘무주공산’이 된 서울 구로 을 지역구에서 김의원을 대체할 만한 거물급 후보로 박실장과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등 동교동 인사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상도동과 동교동이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지에는 회의적인 전망이 많다. 우선 구심이 되었던 YS와 DJ의 정치적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 각 진영에서 조언자 혹은 심판자로 나서는 보조적 역할은 가능하겠지만 정치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실질적인 힘은 약하다는 평가이다.
구성원들의 응집력도 느슨해졌다. YS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상당수 정치인이 현재 그의 곁을 떠나 경쟁의 대상이 되었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대통합민주신당에서 대권 도전을 준비하고 있고,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는 열린우리당에 이어 이번에는 이회창 전 총재의 자유신당에 둥지를 틀어 대권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상황은 동교동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선에서 호남 80% 득표율로 건재함을 과시하기는 했지만 호남 민심이 ‘포스트 DJ’를 원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다 대선 과정에서 옛 민주당 인사들이 이명박 당선인이나 이회창 전 총재 쪽으로 대거 이동하는 등 내부 균열도 심상치 않다.
안동선·이윤수 전 의원 등 범동교동계 인사들과 옛 민주당 원외위원장들은 이회창 전 총재를 지지하고 자유신당 창당을 돕고 있다. DJ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던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 출신 인사들의 모임인 ‘연청동우회’는 이명박 당선인에 대한 지지를 공개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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