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 괴담’에 좌불안석 힘 빠진 중진들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 승인 2008.02.1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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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출마 강요 분위기에 전전긍긍 정치 책임론·후진 양성론 등 이유도 갖가지

 
출마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실제로 고민을 많이 했다.” 천정배 통합민주당(이하 민주당) 의원이 지난 2월12일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털어놓은 속내이다. 대선 참패 후 당내에서 노무현 정부 핵심 인사의 책임론이 확산되자 천의원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3선의 천의원은 노무현 정부에서 법무부장관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냈다.
이날 간담회에서 천의원은 “진짜 책임지는 것은 민생 개혁 세력을 다시 비판 세력으로 만드는 일”이라며 불출마 가능성을 일축했다. 다음날 그는 자신의 지역구인 안산시청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총선에 출마하기로 했다”라고 공식 발표했다.
천의원이 이틀 동안 연이어 기자간담회와 기자회견을 열면서까지 4선 도전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총선을 앞둔 중진 의원들이 처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현역 유력 정치인이 불출마가 아닌 출마 선언을 별도로 해야 할 만큼 ‘중진 물갈이’ 바람이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3선 이상 의원은 모두 55명이다. 국회의장을 지낸 김원기 민주당 의원과 자유선진당에 입당한 조순형 의원이 6선으로 최다선이다. 이밖에 5선이 7명이고 4선이 8명이며 3선이 38명이다(표 참조). 이들 중 일부가 불출마를 선언했거나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대다수 중진들은 여전히 출마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공천 쇄신’에 대한 당내 기대는 ‘중진 불출마’를 강요하는 분위기마저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다 칼자루를 쥔 당 공천심사위원회도 ‘엄격한 공천 심사’에 나서겠다고 벼르고 있어 공천 결과에 따라 일정 부분 내홍은 불가피해 보인다.
박재승 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은 지난 2월14일 MBC라디오에 출연해 “부정·비리 연루자는 엄격하게 심사할 것이며 구체적인 심사 기준이 정해지면 당내 거물급 인사도 예외는 없다”라고 밝혔다. 갖가지 비리에 연루되어 사법처리를 받은 당내 중진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대대적인 물갈이를 예고하는 발언으로 해석된다.
안강민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도 지난 2월11일 공천 기준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서 “그동안 애국심이나 국가관, 뚜렷한 소신도 없고 국회의원을 왜 하는지 의심스러운 분이 많았다. 무너진 경제를 살리고 지난 10년간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바로 세울 후보를 공천하겠다”라고 말하는 등 중진을 포함한 현역 의원 물갈이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공천 일정 등 총선 준비 정도가 다른 만큼 중진들이 처한 상황에는 당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공천 쇄신’은 그 당의 텃밭에서 이루어져야 실제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민주당은 호남, 한나라당은 영남이다.
민주당은 이제 막 ‘공천 쇄신’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합당으로 인해 호남 지역의 공천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 만큼 이 지역 중진들을 향한 당내 시선은 따갑다. ‘2선 후퇴’를 하든지 아니면 서울·수도권에 출마하는 ‘희생적 결단’을 내려줄 것을 바라는 분위기이다.
상대적으로 한나라당 중진들은 여유를 되찾고 있다. 한 차례 태풍이 할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공천 신청이 마감되어 영남 중진 물갈이의 폭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형인 5선의 이상득 국회부의장이 출마를 선언해 일종의 보호망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막바지 칼바람은 여전히 남아 있어 공천을 받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민주당에서는 “총선 출마가 책임지는 행위”

중진들의 총선 행보를 가로막는 것으로는 부정·비리 연루와 같은 개인적인 문제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정치 책임론’이다. 천정배 의원처럼 노무현 정부에서 직·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민주당 중진들이 주요 대상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사부’로 불리는 6선의 김원기 전 국회의장과 초선이지만 노무현 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으로 열린우리당 사무총장과 최고위원을 지낸 염동연 의원이 이미 불출마를 선언했다. 염의원은 성명서를 통해 “임기를 마치는 대통령과 진퇴를 함께하는 것이 정치 도의상 마땅한 것이기에 불출마를 결심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노무현 정부의 실세 총리로 활동하며 친노 세력의 대부로 평가받아온 5선의 이해찬 전 총리도 총선 불출마로 가닥을 잡았다. 앞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3선의 김한길 의원도 지난 1월7일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김의원은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치의 실패에 대해 사죄하는 심정으로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후배 정치인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후진 양성론’도 거론된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과 이해찬 전 총리의 경우 이같은 이유가 불출마를 결심하는 데 일정 부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총리의 경우 정치적 터전인 서울 관악 을 지역구를 정태호 전 청와대 대변인에게 넘겼다. 임채정 국회의장도 후배 양성을 위해 총선 불출마를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에서는 3선인 김용갑·김광원 의원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후배 정치인에게 길을 터주었다. 두 의원 모두 한나라당 강세 지역인 영남에 지역구를 두고 있다. 지난 1월3일 일찌감치 정계 은퇴를 선언한 ‘원조 보수’ 김용갑 의원은 “3선 의원이면 국회의원으로서는 환갑이다. 이제 박수칠 때 떠나려고 한다”라고 소감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초·재선에 비해 3선급 이상 중진들의 의정 활동 성적이 상대적으로 좋지 못하다는 점도 물갈이 대상이 되는 이유 중 하나로 제기된다. 실제 <시사저널>이 이달 초 전체 국회의원의 의정 활동 성적을 조사한 결과 평균 법안 발의 건수가 초선은 1인당 21.9건, 재선은 14.8건인 반면 3선은 12.5건, 4선 이상은 3.23건에 그쳤다. 발의된 법안의 가결 건수도 초선은 1인당 2.31건, 재선은 1.43건인 반면 3선은 0.74건, 4선 이상은 0.29건으로 나타났다.
반론도 있다. 우선 ‘정치 책임론’과 관련해 ‘불출마가 과연 책임지는 자세이냐’라는 지적이 나온다. 민주당의 경우 다가온 총선에서 호남을 제외한 전국 대다수 지역구에서 힘든 싸움이 예상되고 있어 오히려 출마를 선택하는 것이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라는 주장이다. 김근태·문희상·천정배·한명숙 의원 등 수도권 중진들은 ‘장렬하게 전사하자’라는 각오로 출마를 결심했다고 한다.
‘후진 양성론’은 그 효과에 의문이 제기된다. 후배 정치인에게 자리를 물려준다는 좋은 뜻으로 출마의 뜻을 접었는데 오히려 비개혁적인 구태 정치인이 자리를 꿰찰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만큼 현역이냐 아니냐가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의정 활동 성적에 대해서는 법안 발의나 가결 건수로 단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선수가 높아질수록 정부와 국회, 정당에서 정무적·정치적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법안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같은 반론은 선수나 나이를 기준으로 출마 여부를 강요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낳는다.
총선을 40여 일 앞둔 여의도 정가에는 여전히 ‘중진 괴담’이 떠돌고 있다. 조만간 물갈이 공천의 광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관측이 아직도 우세하다. 현역 중진 의원이 총선 출마 선언식을 대대적으로 펼치는 모습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가운데 결전의 날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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