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지형 바꾸는 ‘공천 잔혹 쇼’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 승인 2008.03.1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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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기선 잡기 물갈이 경쟁 치열…현역 의원 잇단 탈락으로 내부 갈등도 한나라당 ‘범MB계·’ 통합민주당 ‘새로운 진보’ 세력이 주류로 떠오르는 계기 될 듯

 
여야의 공천 개혁이 본격화했다. 여당인 한나라당에서는 막판에 현역 의원들이 잇달아 탈락하면서 당내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3선인 이재창 의원, 4선인 이규택 의원 등이 고배를 마셨다. 친 박근혜계가 정면 반발하면서 원심력이 커지고 있다. 영남권 심사 결과가 발표되면 당은 한바탕 혼란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현역 의원이 최소 40% 이상 탈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야당인 통합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는 ‘금고형 이상의 비리 전력자’를 공천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에 따라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홍업 의원, 김민석 전 의원 등이 공천에서 탈락했다. 민주당 또한 ‘호남 물갈이’가 본격화하면서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공천 탈락에 불복해 항의하는 강도가 세지고 있다. 여야 탈락자 일부는 무소속으로 출마할 태세이다. 그러나 대세를 뒤집기는 어려워 보인다.
내각과 청와대 수석 인사를 계기로 한바탕 자웅을 겨룬 여야는 4·9총선을 앞두고 공천 승부가 최대 고비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누가 이른바 ‘개혁 공천’ 모양새를 취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은 민주당이 먼저 문을 열어제쳤고 이에 뒤질세라 한나라당이 따라가는 모양새이다. 여야의 공천 작업은 3월 중순에 완료될 것으로 보인다. 선거가 한 달도 안 남았기 때문에 전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공천은 정치권에 새로운 인맥 지도를 그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내부의 권력 역학관계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다. 사활을 걸고 공천 국면에서 자기 사람을 심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과반수를 훨씬 넘기는 압도적인 승리를 꿈꾸는 한나라당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두언·박형준 의원 등 소장파들을 잇달아 만난 것이 반증이다. 이대통령은 공천이 심상치 않게 굴러가자 인사 국면에서 멀리했던 이들을 다시 불렀다. 그동안 한나라당 공천을 두고 ‘나눠 먹기 공천’이라는 말이 무성했다. 공천 작업이 본격화하기 전 이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만나 ‘타협’하면서부터 개혁 공천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소장파들이 그렸던 ‘공천 혁명을 통한 선거 압승’ 디자인은 폐기 처분되었다. 대신 ‘당내 화합을 통한 안정 공천’ 기조를 주장한 원로들의 의견이 득세했다. 정점은 이상득 국회부의장의 공천이었다.
인명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은 “이명박계가 독식하려고 한다”라며 경고하기도 했다. 서울 지역에 나섰다가 공천에서 탈락한 한 후보자는 “이대통령의 측근 의원이 지역 유력 인사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해 특정인을도와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집요하리만치 적극적이었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공천 국면에서 이재오 의원이 외톨이가 되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의원이 막후에서 이상득 부의장의 공천 탈락을 꾀했고 박근혜계가 이부의장이 공천을 받도록 도왔다는 말이 회자되면서 박근혜-강재섭-이상득 3자 협조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관측이다. 반면 소장파들을 대거 진출시키기 위해 진력한 이의원은 정두언·박형준 의원 등 신주류 소장파들과 더욱 밀착하는 모양새이다. 범MB(이명박)계의 분화이자 총선 이후 전당대회 경쟁이 본격화할 때 세력이 다시 나뉘어질 것임을 예상하게 하는 구도이다.
그러나 공천 결과에 반발하는 박근혜계의 움직임이 변수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지난 3월6일 이규택·한선교 의원 등 자파에 속한 현역 의원들이 탈락하자 “경선 때 나를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천에서 탈락시켰다”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영남 지역 3선 이상 중진 의원들의 상당수가 친 박근혜계이기 때문에 이들이 또 탈락한다면 한나라당은 큰 회오리에 휩싸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박 전 대표가 갈수록 계파 수장으로서만 입지를 다지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 지도자’ 이미지는 그만큼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그녀를 도왔던 한 전직 의원은 “박 전 대표가 좀더 크게, 멀리 보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막판에 ‘감동을 주는 공천’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계파의 벽’이 한나라당을 가로막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손학규 대표의 또 다른 승부

공천 이후 한나라당에서는 ‘범MB계’가 주류를 형성할 것이 분명하다. 특히 ‘진골’ MB맨들이 정치권 전면에 등장하면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기존 한나라당 색깔과는 다른 합리적이면서도 대북 문제에서 유연성을 갖고 있는 젊은 ‘뉴 보수파’들이다. 전문성이 있으면서도 실전 경험을 통해 정치 경력을 쌓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울 노원 을에 공천을 받은 권영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 서울 광진 갑에서 공천장을 따낸 권택기 전 당선인 비서실 정무기획팀장, 인천 계양 갑에서 금배지에 도전하는 김해수 전 대선 후보 비서실 부실장, 서울 성북을 후보가 된 김효재 전 대선 후보 언론특보 등이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공천 개혁에 발동을 걸면서 ‘저승사자’로 불리는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이 크게 떴다. 당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 박지원·신계륜 등 물 인사들을 ‘금고형 이상의 비리 전력자는 공천 배제’라는 카드 하나로 가볍게 정리했다. 단호하고 매섭다. 이들이 앞으로 정치적으로 재기하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 같다. 손학규 대표는 손 안 대고 민주당을 쇄신하고 있다. 저절로 민주당에 짙게 드리운 ‘DJ(김대중) 그늘’에서도 벗어나고있다. 3월6일 낙천 인사 가운데는 박지원·김홍업·설훈·신건 등 동교동계 인사가 35%에 달한다. 민주당내 물밑 세력 판도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당내에 상당한 세력을 형성한 정동영 전 대선 후보측 인사들도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민주당도 ‘호남 물갈이’를 통해 최소한 30% 이상의 현역 의원을 갈아치우기로 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현역 의원들을 낙천시키는 형국이다.
민주당은 공천 작업을 통해 실용을 중시하면서도 환경과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새로운 진보 세력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손학규 세력’이 그만큼 강화된다고 볼 수 있다. 애초 취약했던 손대표의 리더십은 갈수록 단단해져가고 있다. 동교동계의 퇴진을 계기로 남의 변화도 더욱 빨라질 것이다. 손대표는 강금실 최고위원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두 사람은 향후 민주당의 대권 행보에서도 동반자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상대적으로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의 경우 호남 기반이 흔들리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나라정책원 김광동 원장은 “손대표가 향후 실용 노선을 강화하면 실질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보를 보인다면 한나라당으로서는 곤혹스런 입장에 처할 수 있다”라고 내다보았다.
이번 총선에서의 승부는 이명박 대통령과 손학규 대표의 향후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고비이다. 이대통령이 공천 막판에 직접 관심을 표명하면서 개입하고 있는 것이나 박재승 위원장을 내세운 손대표가 민주당을 쇄신해가는 것은 이제 두 사람의 관계가 제 위치를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용’ 노선을 중시하는 두 사람의 ‘진짜 승부’가 총선을 계기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공천 이후 두 사람은 총선 승부처인 수도권민심을 잡기 위한 막판 대공세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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