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봐야 비극 막습니다”
  • 반도헌 기자 bani001@sisapress.com ()
  • 승인 2008.03.2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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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들, 의료 민영화 도입 추진하는 정부에 맞서 <식코> 보기 캠페인 벌여

 

몸이 아파서 병원을 가야 할 때 집에서 가까운 병원보다 먼저 자신이 가입한 보험회사와 계약을 맺은 병원을 먼저 찾아봐야 하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폐지되었을 때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상황이다. ‘당연지정제’란 모든 병·의원 등 요양 기관이 정당한 사유 없이 건강보험 적용을 거절할 수 없고 가입자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제도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몸이 아픈 환자라면 어느 병원을 찾아가도 진료를 받고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병·의원과 약국은 모두 ‘당연지정제’로 되어 있어 어느 병원에서라도 의료보험증만 가져가면 같은 값에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이 ‘당연지정제’를 이명박 정부에서 폐지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어 의료 분야의 시민단체들이 반대하고 있다. 이들 시민단체는 <식코(SICKO)>라는 미국 영화를 매개로 반대 운동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의료 정책을 막아내기 위해 건강연대, 보건의료노조, 민주노총 등 100여 개의 노동·보건의료·시민사회단체는 합동으로 ‘함께봐요, <식코>’라는 이름으로 전국민을 상대로 다큐멘터리 영화인 <식코> 보기 공동 캠페인을 펼친다. <식코>는 4월3일 전국 38개 극장에서 개봉될 예정이다.

4월3일 전국 38개 극장에서 개봉 예정
영화가 현실 정치의 현안과 맞물린 셈이다. 당연지정제 폐지 반대 운동 진영에서는 지난 3월10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경제 운영 방안에 영리 의료법인 도입과 민간 의료보험 활성화 추진안이 포함되어 있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의료 서비스 규제를 완화해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고 고급 의료 서비스 체제 구축을 통해 외국 환자를 유치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정책을 시민단체들은 이명박 정부의 의료 민영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들 단체는 지난 3월18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과 <식코> 시사회를 열면서 캠페인의 출발을 알렸다. 참여연대의 박원석 협동사무처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한 영화를 전국적으로 보자는 캠페인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한국 건강보험 제도가 붕괴될 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에 나섰다”라고 참가한 이유를 밝혔다. 또한 “의료가 상품화되어 치료권을 박탈당한 미국의 생생한 의료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 <식코>를 함께 보자”라며 한국 의료 공공성을 지키기 위한 캠페인에 국민이 동참하기를 희망했다.
캠페인의 중심에 있는 영화 <식코>는 의료 민영화에 따른 미국의 의료 현실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식코>는 고교생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볼링 포 콜럼바인>, 9·11 테러를 다른 시각으로 보여준 <화씨 911> 등 초강대국인 미국의 폐부를 적나라하면서도 재치 있는 화법으로 풀어낸 바 있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작품이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미국이지만 의료 체계만큼은 그렇지 못하다. 존 그리샴의 <레인메이커>나 댄젤 워싱턴이 주연을 맡은 <존큐> 등의 작품에서 미국 의료 체계의 모순이 그려진 적은 있지만, <식코>에서 민영 의료보험 체제로 인해 실제로 피해를 겪은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특유의 리얼리티가 돋보인다.

 

<식코>가 보여주는 미국의 현실은 충격적이다. 미국에서는 전국민의 15%가량인 4천8백만명이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보험료를 감당할 만큼의 경제 사정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 외에도 저체중 혹은 과체중으로 질병이 발생할 위험이 크거나 질병에 걸린 경험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보험 가입이 거부되었다. 보험 가입 상담을 맡았던 한 여직원은 “보험 가입 거부 사유를 다 적으면 온 집안을 다 두르고도 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영화는 보험 가입이 안 되어 찢어진 다리 상처를 직접 꿰매는 사람과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었음에도 중지 6만 달러, 약지 1만2천 달러의 엄청난 접합 수술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중지를 쓰레기통에 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례를 통해 이들의 어려움을 드러내 보인다.
하지만 감독이 영화에서 밝혔듯이 이 다큐멘터리는 보험에 가입한 2억5천만명을 위한 영화다. 보험에 가입한 이들조차 의료 혜택을 받기가 어려운 것이 미국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 여인은 40°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안고 병원을 찾아가지만 보험사와 계약이 안 되어 있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당해 결국 아이를 잃고 만다. 20대 초반의 미혼모는 자궁경부암에 걸렸지만 그 나이에 앓을 병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험회사로부터 치료비 지급을 거부당한다. 그녀는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진료비가 무상인 캐나다인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미국 의료 민영화의 실상 적나라하게 드러내
의료 민영화의 비정함은 미국의 영웅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9·11 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찰관과 소방관은 미국민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5년이 흐른 후 그들 중 일부는 뉴욕 출신이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 자원했다는 이유로 의료 혜택에서 벗어나 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피해자들을 데리고 “미국에서 유일하게 무상 의료 혜택이 돌아가는” 관타나모 수용소와 적대 국가이지만 의료 체계가 잘 갖추어진 쿠바를 찾아갔다. 이들은 쿠바 의료진으로부터 치료를 받으며 감격과 회한의 눈물을 보였다.
미국의 민영 보험회사(HMO)들은 가입자들의 진료비 청구를 거부할수록 회사에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익이 목적인 HMO가 이익보다 윤리를 우선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HMO의 심사위원이었던 내과 의사 린다 피노가 미국 의회에서 진술한 내용은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1987년에 한 환자의 수술을 거절했다. 이로 인해 보험회사는 50만 달러의 의료비를 아낄 수 있었다. 환자의 진료비 청구를 거절할수록 더 많은 급료를 받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식코>가 보여주는 미국 의료 민영화의 실체는 충격적이다. 우리 정부가 의료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함께 보자, <식코>’ 캠페인에 참가하고 있는 공공노조의 이정호 교선실장은 “영리의료법인을 도입하면 병원이 고가진료만을 선호하게 되고 인수·합병을 통한 투기 수단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당연지정제 폐지는 특정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일부 3차 병원의 진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낳을 수도 있다. 의료 민영화를 실시하고 있는 미국이 의료 영역에서는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국민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식코>에서 민영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한 닉슨 대통령은 보험 지급을 줄여서 이익을 높이는 보험회사의 새로운 전략을 듣고 “괜찮은 생각이군”이라고 말한다. 다음날 민영보험을 도입한다는 공식 기자회견에서 그가 밝힌 이유는 보험회사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에게 좀더 나은 의료혜택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마이클 무어가 제작한 일련의 다큐멘터리 필름들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동시에 한쪽만 쳐다본다는 비판도 듣고 있다. 그러나 <식코>에 등장하는 예에서 보듯 미국의 의료 민영화 모델이 질 높은 의료 서비스의 등장을 부추겼지만 저소득층의 의료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부작용을 동반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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