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집’이 주는 힘 혹은 아름다움
  • 이재언 (미술평론가) ()
  • 승인 2008.03.2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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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면서 다른’ 두 개의 봄맞이 전시 원색의 그림 조각과 다중 집합 추상회화 눈길

 

봄을 맞아 미술계가 다시 활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뜨거웠던 시장의 열기가 이제 어느 정도 걷히고, 차분하게 작품들을 향유하는 분위기로 정착되어가는 것이다. 봄의 서장을 연 전시들 역시 내용적으로 알차면서도 비교적 조용하게 막을 내린 것들이 많다. 최근에 있었던 전시들 가운데 눈길을 끈 것은 서울 인사동에서 선보인 ‘데이비드 걸스타인 전(David Gurstein·65·이스라엘)’의 회화적 조각 전시와 부산에서 열린 ‘우제길(67·한국) 회화전’이다. 우연히 비슷한 기간에 열린 이 두 전시는 ‘군집이 주는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유사하면서도 너무나 개성이 다른 전시로 기억된다.

데이비드 걸스타인 전-인사아트센터

 


걸스타인은 이스라엘이 낳은 걸출한 팝아트 공예가이자 조각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작가다. 그는 팝아트 작가답게 우리가 생활 주변에서나 혹은 매체를 통해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이미지들을 개성적으로 구성해 산뜻하고도 강렬하며, 아울러 신비감마저 감도는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재능이 대단히 돋보인다. 걸스타인은 화려하고 쾌활한 원색의 그림으로 조각을 함으로써 평면이든 입체든 아주 자신감 넘치는 공간 구성 능력과 재능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다. 금속 판재를 오려 이미지들을 얻은 다음 그것에 속도감이나 율동감이 풍부한 채색을 곁들이고 있어 회화와 조각의 완벽한 결합을 보여주고 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 말을 달리는 사람들, 조정 경기하는 사람들, 혹은 나비들이 군무를 펼치고 있는 모습은 다분히 매체에서 본 듯한 것이면서도 대단히 강렬하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일정한 모티브를 중심으로 한 단위체들이 군집을 이룸으로써 시각적 경험의 밀도와 강도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단위체들 혹은 요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작가의 공간에는 더욱 강한 속도감과 격렬한 리듬이 생성된다. 반면 요소들의 응집이 이완되거나 해산될 때 다시 침잠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개별 단위체들, 즉 사람이나 나비 등의 이미지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더 큰 시각적 효과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백남준의 <다다익선>에서 시사된 것처럼 미디어의 힘은 집합 상태에서 발휘된다는 것과 상통한다. 미디어 복합 혹은 다중이 가지는 강력한 권력은 사회 구조에서만이 아니라 그림이나 조각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개체들의 특징이 다양하면 다양한 대로, 혹은 다르면 다른 대로 그것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우선 걸스타인의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싸이클을 타는 사람들의 개별 이미지는 다를 수도 있고, 유사할 수도 있다. 또한 복잡한 듯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단순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리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군집을 이루면서 전혀 새로운 이미지나 질서를 생성시키게 된다. 작가의 작품에서 주로 나타나는 새로운 효과는 거대한 하나의 리듬으로 주어지고 있다. 작가의 작품은 특정의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테제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막연하나마 동시대의 패러다임에 대한 암시를 전해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작품은 상투적인 이미지들이 가볍고도 유쾌한 경험을 유발한다. 가벼움이나 쉬움은 아무래도 예술에서 조심스러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터부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예술이 부지불식간에 조장한 엄숙함 혹은 경건함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요소들이 많다.
사실 작가의 작품에서 어렵다거나 혹은 무겁다거나 할 만한 내용은 없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작품이 단순한 가벼움만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바로 군집의 다양한 조율을 통해 우리의 경험은 무수히 많은 검색의 경우와 순열들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우제길 회화전-부산 한국아트미술관
서양화가 우제길은 호남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찍부터 추상 양식에 투신한 작가다. 자타가 공인하는 예향인 호남 지역이 문인화 및 인상주의 화풍의 전통이 지배적인 곳임에도 1960년대부터 추상회화를 시작했다는 것은 작가의 남다른 기질을 엿보게 한다. 작가의 작품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기하적인 색면의 추상 양식이라는 한 길을 걸어왔다. 마치 금속 면들이 섬광에 반영하고 있는 것 같은 예리함과 차디찬 광채가 온 공간을 휘감고 있는 분위기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작가의 화면은 상당히 절제되고 화면 구성에 엄격하기가 말로 이루 다할 수 없다. 작업 자체가 조금의 오차나 실수가 인정되지 않는 숨막히는 것이어서 관객들이 그리 편하게 동참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련된 기하적 구성들이 그림도 그림이지만 의외로 디자인 응용에서 가장 매치가 잘 되는 작품들 중의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힌다.
어떻게 보면 수십 년간 일종의 색면 추상이자 구성주의적 회화를 지속해왔기에, 어느 정도의 조합이 끝나면 더 이상의 수 혹은 돌파구가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의 화단 환경에서 자기 양식에 대한 권태를 극복하지 못했을 때는 작가로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 작가 자신의 오랜 독자적인 방법을 쉽게 버리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 우리 화단에서 천재라고 일컬을 만큼 재능 있었던 작가들이 타계한 지 10년도 안 되어 잊혀진 경우도 적지 않다. 너무 다양한 탐구만 하다 세상을 떠났기에 그 작가 고유의 것이 무엇인지가 어필이 잘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작가가 일찍부터 전략으로 들고 나온 방법이 복합 내지 다중의 집합이다. 이른바 칸막이 그림이라 하여 비슷한 크기의 작은 캔버스들을 상하로 일정하게 계속 연결해나가는 양식이다. 이렇게 되면 관건은 개별 캔버스 내의 구성이나 내용이 아니라 전체적인 배열이나 연출이다. 이러한 다중의 배열은 적어도 작가에게 절묘하게 적중되었다. 실제로 1990년대 말부터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다중적 연결을 많이 시도했지만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은 작가들은 그리 많지 않다. 왜?
그것은 다름 아닌 다중적 집합에 어울리지 않는 구성이나 도상 때문일 것이다. 이미 하나의 유니트에 적절한 콘텐츠가 채워지면 그것들의 조합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아주 적절한 화면의 구성을 통해 앞의 걸스타인이 보여준 다중의 효과를 기대 이상으로 얻고 있는 것이다. 적절히 절제된 여백의 캔버스들이 연장되어갈 때마다 작가의 작품이 가지는 효과는 계속 증대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패러다임과 통하는 ‘군집의 힘’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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