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안전 귀가’ 챙겨라
  • 이은지 기자 lej81@sisapress.com ()
  • 승인 2008.03.31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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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성범죄 막는 데 법·경찰에만 의존 못해 효율적 제도로 촘촘한 사회 안전망 구축해야

 

아이가 집에 오자마자 운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는데 옆집 아저씨가 여기도 만지고 저기도 만지고….”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도 순간 이웃이, 경찰이, 나라가 원망스럽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윤상 부소장은 “어이없이 당한 아이를 바라보며 자책을 하거나 주변을 원망하는 부모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아이를 보호할 의무를 가족에게만 전적으로 맡겨서는 안 되며 국가가 나서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경찰청 여성청소년과 민경화씨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민씨는 “아이 한 명당 경찰 한 명이 붙어서 보호할 수는 없지 않느냐. 1차적으로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는 부모에게 있다”라고 말한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
경찰대 표창원 교수는 “양측의 말이 모두 맞다. 이는 서로의 말이 모두 틀렸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양측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이 대상 성범죄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표교수는 “가족과 국가의 역할 분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합의된 역할을 제도로 정착시킬 필요도 절실하다”라고 주장했다.
우선 현행 제도를 어떻게 손질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어린이 성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정부가 2000년 제정한 청소년성보호법은 많은 한계점을 안고 있다. 공소 시효가 7년으로 정해진 탓에 아이가 성인이 되어 판단력을 가졌을 때는 가해자를 고소조차 할 수 없다. 미국은 어린이 성범죄의 경우 공소 시효가 없다. 우리나라는 시민단체들이 줄곧 공소 시효를 늘리거나 없앨 것을 요구했지만 2008년 2월 개정안에도 반영되지 않았다.
어린이 성범죄자의 신상 정보 등록 대상도 너무 제한적이다. 2001년 8월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기로 한 이후 공개된 명단은 6천5백명에 불과 하다. 성범죄자가 유죄 확정 판결을 받거나 법원이 열람 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났기 때문이다. 이 명단이라도 열람하려면 범죄자가 거주하는 관할 경찰서로 직접 가야 한다. 그것도 해당 지역 주민만 가능하다. 인터넷에 공개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한 미국과는 차이가 난다. 미국 뉴저지 주는 메건법을 통해 성범죄자의 거주지를 반드시 신고하게 하고 그의 정보를 인터넷에 게재한다. 텍사스 주는 해당 범죄자의 집과 차량에 성범죄 전과자 팻말을 부착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이는 신상 공개를 성범죄자에 대한 추가적인 처벌로 보지 않는 미국의 사회 풍토에서 나온 조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성범죄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의견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대해 표교수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말하는 보호받아야 할 성범죄자의 범위가 너무 넓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를 비롯해 재발 가능성이 높거나 죄가 중한 경우에 대해서는 공개해야 한다”라며 성범죄자의 인권보다 아이들의 생명 보호가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CCTV 설치, 안전 지킴이 집, 순찰 강화 등 예방책 제도화해야
예산 부족으로 스쿨존 주변에 CCTV가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자 안명옥 의원은 어린이복지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내놓았다. 총 7천6백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학교 한 곳당 4대의 카메라를 설치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심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17대 국회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곧 폐기될 처지에 놓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우예슬·이혜진 양 사건을 계기로 경찰청이 지난 3월26일 내놓은 ‘어린이·부녀자 실종 사건 총력 대응 체제’에 CCTV 설치를 늘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대 설치하는 데 2천만원이라는 비용을 지자체의 예산으로 감당하기에는 벅차 보인다.
이외에 경찰청이 내놓은 대책에는 ‘실종 사건 수사 전담팀 운영’ ‘아동 안전 지킴이 집 운영’ 등 다소 진전된 제도가 포함되어 있다. 아동 안전 지킴이 집은 미국의 ‘마그노프의 손’(어린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손 모양이 그려진 스티커가 부착된 집으로 뛰어 들어가면 주인이 도와주도록 한 제도)과 유사하다. 아동 안전 지킴이 집으로 지정된 학교 주변 상가의 경우 위험에 처한 어린이가 도움을 청하면 임시로 보호하거나 112에 신고해야 한다. 경찰과 지역 주민이 함께 구축한 치안 시스템인 셈이다. 이 제도가 운용의 묘를 살리기 위해서는 한정된 경찰력에 우리 아이의 안전을 100% 의지하지 않겠다는 지역 주민의 인식 전환이 전제되어야 한다. 여기서 좀더 나아가 미국이나 영국처럼 ‘세이프티 커뮤니티’를 조성해 경찰과 민간이 신뢰하고 서로 지원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 또한 필요하다.
경찰청은 또 2007년 4월부터 실시한 앰버 경고(실종자를 전광판 등으로 알리는 긴급 경보 체제)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앰버 경고를 발령하는 기관·매체 수를 현재 18개에서 30여 개로 늘리기로 했다.
하지만 경찰은 정작 중요한 순찰 강화에 대해서는 다소 미온적이다. 국가청소년위원회가 지난 7년간 성범죄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어린이 성범죄 발생 시간은 오후 3~4시가 가장 많았으며, 범죄의 74%가 학교 반경 2km 이내에서 발생했다. 경찰이 초등학교 저학년 하교 시간인 오후 3시를 기점으로 순찰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거둘 수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경우 하교 시간에 맞춰 경찰이 관할 학교에 파견되어 교통정리를 해주며 적극적으로 어린이 보호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찰청 여성청소년과 민경화씨는 “이미 하교 시간을 중심으로 어린이 보호구역과 학교 주변 순찰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문제는 아이를 한적한 곳으로 유인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국처럼 만 11세 이하 어린이는 혼자 귀가할 수 없게 하는 법을 만들고 이에 맞춰 경찰의 인력 배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말했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 입장에서는 공적 기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방과 후 학교나 24시 탁아소가 활성화되지 않은 현실적 문제로 인해 아이가 집에 혼자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은 만 10세 이하 어린이를 혼자 두게 하면 부모가 형사 처벌을 받기도 한다. 1차적으로 아이의 보호 의무를 부모에게 두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미국 여성들은 정규직보다 파트타임을 선호한다.
해바라기아동센터 최경숙 소장은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부모에게는 아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고 아이는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독립심을 키운다고 저학년 아이를 혼자 하교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조언했다.
어린이는 우리 모두에게 귀한 손님이자 선물이다. 그런 어린이를 성범죄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는 좀더 정교해진 제도, 좀더 효율적인 제도를 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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