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인권은 있고 죽은 아녀자 인권은 없다는 말인가”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 승인 2008.03.3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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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흉악 범죄 늘어나 사형 제도 존치 여론 확산 / 이전 정부, ‘입장’ 유보한 채 지난 10년간 사형 집행하지 않아
 

우리나라는 지난해 12월30일 세계에서 1백34번째로 ‘사실상 사형제 폐지 국가’가 되었다. 지난 10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음으로써 국제 민간인권운동단체인 앰네스티로부터 사형 폐지 국가로 인정받은 것이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30일 23명의 사형을 집행한 것이 마지막이다. 그 이후로 사형 집행은 없었다. 지난해 말에는 특별사면과 감형으로 사형수 6명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면서 대한민국에서 사형제는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부녀자 살해 사건, 안양 초등학생 납치 살해 사건 등 흉악 범죄가 잇달아 터지면서 ‘사형제 존치론’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법무부는 사형 제도를 공론화하고 여론 수렴을 통해 법률 개정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대통령은 사형제 존치론자다.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사형제 폐지보다는 존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다만 인명 살상이나 반인류적 범죄 등으로 사형을 제한하는 선에서 법을 개정하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사형제에 대한 국가 차원의 입장은 ‘유보’ 상태다. 사형을 실시하지 않았던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폐지’를 공식 입장으로 내놓지 못했다. 국민 다수가 사형제 폐지를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유엔에서 사형제 폐지를 위한 결의안을 채택할 때에도 우리나라는 기권을 선택했다. 2002년과 2003년 사형 제도 폐지 결의안이 상정되었을 때는 반대표를 던졌다. 국회에서도 수차례에 걸쳐 사형 제도 폐지 법안이 발의되었으나 자동 폐기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사형제 폐지 법안은 1999년 15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되었고 16, 17대에서는 과반수의 의원이 법안에 서명까지 했다. 하지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2003년 국민 의식조사에서 86%가 사형제 폐지 반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던 데는 정권의 이념 성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인권 국가’를 표방했던 정권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데는 상당한 부담이 따랐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형을 집행하지 않으면서 국가 차원의 ‘폐지’ 입장을 정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들의 임기에는 비켜갔던 것이다.
사형제 폐지를 반대하는 국민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 지난 10년간은 사형제 폐지를 위한 전 단계라기보다는 사실상 ‘휴면 상태’였다.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의 여론은 사형제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지난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국민 의식조사에서도 일반 국민의 86.8%가 사형 제도의 폐지에 반대했다. ‘즉시 폐지’를 원하는 사람은 13.2%뿐이었다. 최근에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사형제 존치 의견이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 ‘리얼미터’가 최근 전국 19세 이상 5백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57%가 ‘사형제가 존속되어야 한다’라며 사형제에 찬성했다. 반면 22.2%가 ‘폐지되어야 한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이는 존속 45.1%, 폐지 33.8%였던 2006년 조사에 비해 사형제를 지지한다는 응답이 대폭 증가한 것이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지난 3월21일 경기도 지역 기관장 모임에서 초등학생 살인 사건과 과거 연쇄 살인범 유영철 사건 등을 거론하며 “여성들을 참혹하게 죽이고도 사형 집행이 안 되는 것은 잘못이다. 범죄자 인권은 있고, 아녀자들의 인권이 없는 나라라면 인권이 없는 나라인 셈이다”라며 사형제 존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네티즌들도 사형제를 존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살인자의 인권보다는 ‘법의 엄중한 심판’을 통해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들은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인권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형 제도가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국가는 인권의 가장 기본권인 생명권을 직접 침해해서는 안 된다. 사형제 폐지는 사형수의 목숨을 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존중하자는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해마다 흉악 범죄가 늘어나는 것도 사형제 존치 여론에 힘을 실어주는 요인이 되고 있다. 대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살인, 강도 등 흉악 범죄를 저지른 흉악 사범은 7천8백81명이었다. 2006년 7천71명보다 11.4% 늘어난 수치다.
1948년 건국 이후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9백98명이다. 현재 사형확정판결을 받고 구치소에 수감 중인 사형수는 58명이다. 사형수들은 일반 재소자들과 달리 형이 집행되지 않은 ‘미결수’들이다. 구치소 안에서 ‘최고수’로 불린다. 더 무거운 형량을 받은 수감자가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들은 교도소가 아닌 구치소에 수감된다. 현재 사형수는 서울·부산·대구 등지의 구치소에 분산 수감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일반 기결수와 달리 교정·교화 프로그램 대상이 아니다. 하루 30분 운동시간이 야외 활동의 전부다. 거의 매일 구치소에 있으면서 형 집행을 기다리는 것이 일과라면 일과다.

 

사형제 존치하면서 법 개정하는 쪽으로 방향 잡을 듯
현재 구치소에 수감 중인 사형수들의 면면을 보면 한때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들이다.
1996년 9월 중순 ‘지존파’를 모방한 일명 ‘막가파’ 5명은 범죄 단체를 조직한 뒤 귀가 중이던 40대 여성을 승용차로 납치했다. 이들은 이 여성의 금품을 빼앗고 구덩이에 산 채로 넣어 살해했다. 두목 격인 최정수는 사형을 선고받고 현재 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2004∼2006년 서울 서남부 지역에서 아무 이유 없이 13명을 연쇄 살해한 정남규도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씨는 2004년 1월부터 2년여 간 미성년자 2명을 성추행한 뒤 살해하고 길을 가던 20대 여성을 흉기로 찔러 살해하는 등 총 25건의 강도 상해 및 살인 행각을 벌였다.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노인과 부녀자, 정신지체 장애인 등 21명을 살해한 유영철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미집행 사형 확정자 중 최장 기간(15년 3개월) 동안 복역 중인 사형수는 원언식씨다. 원씨는 1992년 10월4일 ‘여호와의 증인’ 왕국회관에 불을 질러 15명을 사망하게 했다. 그 뒤 자수해서 1993년 1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지난 2월에는 전남 보성으로 여행 온 남녀 4명을 자신의 배에 태워 성추행하려다 실패하자 바다에 빠뜨려 숨지게 했던 어부 오 아무개씨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수들의 어머니’로 알려진 조성애 수녀는 “사형수들의 성장 과정은 매우 불우하다. 대부분 계모 밑에서 자라면서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먹지 못했다. 심지어는 개줄로 묶어 놓고 화장실에서 밤을 꼬박 새우게 했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평생 가슴에 원한이 쌓이게 된다. 이 사회가 다 미움의 대상이다. 국민 중에는 ‘교화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형수들을 만나보면 죽이지 말자고 할 것이다. 직접 보지 않기 때문에 흉악범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사형제를 존치하면서 법을 개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당장 사형을 집행하지는 않을 전망이다. 사형제를 둘러싼 논란이 큰 만큼 최대한 신중을 기하려는 모습이다. 사형제 폐지가 국제적 추세라는 것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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