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장수는 어디로 갔나
  • 안성모·김회권 기자 ()
  • 승인 2008.04.1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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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민주당, 핵심 실세·거물들 ‘추풍낙엽’…‘개선 장군’ 정몽준·박진·추미애 거취에 눈길 쏠려

 
선거는 제로섬 게임이다. 승자의 웃음 뒤에는 패자의 눈물이 있다. 이번 총선에는 거물급 인사들 사이에 정치적 명운을 건 대결이 유난히 많았다. 그런 만큼 총선 결과에 따라 여야 정당을 대표하는 유력 정치인들의 희비는 극명하게 갈렸다.
통합민주당은 당 지도급 인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지난해 대권 도전에 나섰던 정치인들 중 천정배 의원과 추미애 전 의원 정도만 살아남았다. 손학규 대표를 비롯해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 김근태 의원 등 당내 계파를 거느린 수장들이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손학규 대표는 지역구 입성은 물론 당 대표로서 개헌 저지선(100석) 확보에도 실패해 상당 부분 입지 약화가 불가피해졌다. 당장 지도부 책임론에 직면할 수 있다. 공천 과정이 순조롭지 못했던 만큼 당내 불만 세력이 적지 않다.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손대표는 총선 다음 날인 4월10일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경선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손대표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선 참패로 위기에 내몰린 당의 대표직을 맡는 ‘독배’를 받아들였고, 안정적인 비례대표를 포기하고 종로에 출마하는 ‘자기 희생’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총선 책임론’을 희석시킬 수 있다. 총선 결과도 대선 직후 예상되었던 참패는 모면하지 않았느냐는 평가가 적지 않다.
‘손학규 사람’이 대거 당 내에 진입해 세력을 형성할 수 있게 된 점도 손대표의 위상을 뒷받침할 든든한 배경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대선 경선 때 손대표를 지지했던 인사 중 김부겸·송영길·정장선 의원 등 15명가량이 원내 재입성에 성공했고, 비례대표로 당선된 예비 의원 다수도 손대표와 가까운 인사들이다.

민주당, 전당대회 5월로 앞당길 가능성

정동영 전 장관은 상처가 더 깊어 보인다. 대선 참패에 이어 총선에서도 큰 표 차이로 떨어져 정치적 타격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 생명의 위기가 거론될 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 한때 당내 최대 세력이었던 정동영계는 공천과 총선을 거치면서 사실상 와해될 처지에 놓였다. 50~60명에 달하던 ‘정동영 사람’ 중 살아남은 이는 이강래·박영선·최규식 의원 등 10여 명뿐이다.
정 전 장관은 당분간 정치권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는 총선 다음 날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좀 쉬고 싶다.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라고 밝힌 후 “쉬게 되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라며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미국 등 해외에 머무르며 통일·외교 분야를 연구하는 방안을 고려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간판’들이 대거 낙마하자 당권 경쟁이 조기에 불붙기 시작했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지도부를 재구성해 총선 후유증을 수습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총선 후 3개월 이내에 치르도록 되어 있는 전당대회를 5월 중으로 앞당겨 실시할 가능성이 커졌다.


차기 당권 주자로는 정세균 의원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정의원은 열린우리당의 마지막 당 의장을 맡아 ‘질서 있는 통합’을 이루어내는 등 ‘구원투수’로 위기의 당을 이끌었던 경험이 있다. 호남 출신에다 당내 반대 세력이 적다는 점도 당을 재정비하는 데 적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탄핵 역풍으로 낙선한 뒤 4년 만에 국회로 복귀하는 추미애 전 의원도 당권 도전이 예상된다. 추 전 의원은 서울에서 민주당 후보로 유일하게 압승을 거두면서 화려하게 재기했다. ‘추다르크’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호불호가 뚜렷해 강력한 야당을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다. 영남 출신이라는 점도 당의 외연 확대 측면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도 당권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강 전 장관은 비례대표를 포기한 채 전국 유세를 책임지는 ‘자기 희생’을 보였다는 점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 4선에 성공한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과 문희상 의원, 호남에서 3선에 오른 김효석 원내대표와 이낙연 의원, 수도권에서 3선에 성공한 김부겸·송영길 의원 등도 차기 당권 주자로 이름이 오르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는 ‘친 이명박’ 실세들이 사실상 몰락했다. 좌장격인 이재오 의원을 비롯해 공천 과정에서 악역을 맡은 이방호 사무총장과 정종복 사무부총장, 경선과 본선에서 이대통령의 입 역할을 한 박형준 의원, 한반도 대운하를 총괄 추진했던 박승환 의원과 경제 정책을 책임진 윤건영 의원 등 이대통령 최측근들이 줄줄이 떨어졌다.
이재오 의원의 낙마는 이미 예상되었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그 충격이 상당하다. 이의원은 “장수는 전쟁에서 지면 군말을 하지 않는다”라며 결과에 승복했다. 향후 거취는 아직 불투명하다. 이명박 정부에서 중용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있지만 당분간은 정치 일선을 떠나 근신해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거취 문제를 떠나 정치적 입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당내 ‘반 이재오’ 정서가 확산되면서 ‘친이’ 내 권력 경쟁에서도 이상득 국회부의장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이방호 사무총장은 총선 다음 날인 4월10일 강재섭 대표에게 전화로 사의를 표명했다. 이총장은 “심신이 너무 지쳤다”라며 당분간 휴식기를 갖겠다는 뜻을 밝혔다. 극심했던 공천 과정에서 ‘친 박근혜’ 진영의 공적으로 지목된 이총장은 선거운동 기간에 박근혜 전 대표 팬클럽 ‘박사모’의 낙선 대상이 되었고, 결국 1백78표 차이로 3선 도전에 실패했다.이명박 대통령을 만든 핵심 세력의 몰락은 당내 권력 구도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유력한 차기 당권 주자였던 이재오 의원이 원 내에 진입하지 못하면서 당내 친이계의 세력 약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당장 오는 7월에 있을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상대로 ‘친이’를 대표해 ‘선수’를 수급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정두언 의원 등 소장파 핵심 측근들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떨어진다.
 

이회창, ‘충청권 맹주’로 우뚝…진보 정당은 엇갈린 성적표

그래서 정몽준 최고위원을 측면 지원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야당 거물인 정동영 전 장관을 재물로 삼아 서울 입성에 성공한 정최고위원은 당권 도전 의사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18쪽 인터뷰 기사 참조). 사실상 대권 행보에 나선 그는 전당대회를 통해 향후 경쟁자가 될 박 전 대표의 대항마로 미리 자리매김하겠다는 계획이다. 지원 세력이 절실하다는 측면에서 친이 진영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수 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종로에서 출마하겠다”라고 발표했을 때 박진 의원실은 분주했다. 때아닌 한나라당의 ‘종로 전략 공천설’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로 지역의 공천 발표를 미루던 한나라당은 결국 박의원을 선택했다. 박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종로를 지켜냈고, 손대표를 무너뜨렸다. 당 대변인, 서울시당 위원장 등을 맡았지만 ‘귀공자 같다’라는 이미지는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싸움닭이 필요한 야당 시절에 박의원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다. 그런 면에서 이번 선거는 박의원에게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전국의 눈길이 모인 한판 승부에서 승리하면서 자신의 체급을 올렸다.

 

총선 이후에 벌어질 한나라당의 세력 다툼에서도 박의원을 향한 구애가 밀려들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재오·이방호·박형준 의원 등 이대통령의 수족들이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이대통령이 박의원을 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자유선진당의 이회창 총재도 상한가를 쳤다. 출구조사가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굳은 표정을 유지하던 이총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웃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만족한다는 뜻이었다. 선진당은 교섭단체는 만들지 못했지만 창당 두 달 만에 18석을 확보하며 제3당으로 뛰어올랐다. 특히 대전과 충남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이총재는 ‘충청권의 맹주’로 자리매김했다.
지방 선거를 2년 앞둔 시점에서 선진당의 눈치를 보는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 의원이 늘어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탈당한 뒤 선진당 공천을 받자마자 당선된 몇몇 경우를 봐도 ‘선진당’ 간판이 대전·충남에서는 매력적이다. 대전은 시장과 구청장 모두가 한나라당 소속이고, 충남은 도지사와 4개 지역의 기초자치단체장이 한나라당 소속이다.
이총재는 현안에 따라 캐스팅보트를 쥐며 선진당의 몸값을 높일 계획이다. 무소속 의원을 영입해 교섭단체를 만들어 현안에 따라 여야와 협력하겠다는 생각이다. 다만 지역을 볼모로 보수적 색채에만 매몰되면서 몰락했던 자민련의 경우를 반면 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진보 정당의 성적표는 엇갈렸다. 민노당의 권영길 의원(경남 창원 을)은 지역구 재선에 성공했다. “어려운 싸움이었다”라는 그의 말대로 악조건 속에서 얻은 승리여서 더욱 값지다. 대선 패배 책임론에서 시작한 민노당의 분열은 결국 분당 사태로 이어졌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라는 문구가 언론에 오르내렸다. 대선 후보였던 권의원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게다가 보수 세력의 강세는 총선에서도 계속되었다. 투표 날에는 비까지 내려 한나라당 후보가 유리하다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결국 승리하며 대중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민노당에서 분가한 진보신당의 노회찬 의원은 한나라당 홍정욱 당선인에게 석패했다. 같은 당 심상정 의원 역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했다. 진보 정당에서 가장 대중성이 강한 두 의원은 결국 수도권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게다가 진보신당은 정당득표에서도 2.94%를 기록해 0.06% 차이로 비례대표 의원을 확보하지 못했다.
ⓒ연합뉴스
진보신당 내부는 애써 위로하는 분위기다. 진보신당의 한 관계자는 “의석 수 하나 둘에 연연하지 않는다. 진보신당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번 총선 패배가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선거운동 기간 동안 ‘노회찬과 심상정이 함께하는 OOO 후보’라는 현수막을 놓고 당 내부에서 “소수의 스타 의원에게만 의지하는 스타 마케팅이 아니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권의원은 재선에 성공한 직후 “진보 진영의 대단결을 위해서 큰 성찰이 필요하다”라고 말해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합당을 논의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합당 논의가 본격화될 경우 그 징검다리 역할을 권의원이 맡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노의원은 “진보 진영은 아직도 낡은 틀을 못 버렸다. 예를 들어 북한을 일방적으로 편든다거나, 대기업 노조에 의존하는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민노당에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노의원은 “노원에서 주민들의 삶으로 파고들어가며 새로 진보 정치를 시작하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새로운 진보 정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낡은 진보 진영으로 비판받는 민노당의 강기갑 의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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