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밟고 계룡산 찍고 ‘산 넘어 정치’
  • 김지영 기자 young@sisapress.com ()
  • 승인 2008.04.21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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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원 대표 사조직 ‘청산회’의 실체 / 대선·총선 거치며 7만명으로 세 확산

 
청산회(淸山會). 친박연대 서청원(徐淸源) 공동대표의 이름에서 청(淸) 자를 따와 만들어진 산악회로 서대표가 정치적으로 재기하는 데 발판이 되었던 사조직이다.
그런데 총선이 끝나면서 이 청산회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청산회 멤버들이 다수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부터였다. 비례대표 당선인 8명 가운데 5명이 청산회 멤버라는 것. 그러면서 당 안팎에서 “서대표가 공천(公薦)을 한 것이 아니라 사천(私薦)을 했다”라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이에 대해 노철래 청산회 회장은 “사실과 다르다”라며 의혹을 일축했다. 노회장은 비례대표 8번으로 당선되었으며, 당 사무부총장을 맡고 있다. 그는 “비례대표 8명 가운데 2명이 청산회 회원이고, 한 명은 예비후보다”라고 말했다. 비례대표 8번인 자신은 회장을, 7번 정영희 당선인은 청산회 자문위원을,  10번 윤상일 예비후보는 운영본부장을 각각 맡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례대표를 신청했던 15명 가운데 3명만이 청산회 출신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더라도 청산회가 친박연대의 핵심 외곽 조직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 회원 수만 전국적으로 7만여 명에 달한다는 것이 노회장의 설명이다.
여기에 일부 언론이 비례대표 양정례 당선인의 어머니 김순애씨가 청산회 회원이며, 산악회를 후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노회장은 “두 사람(양정례·김순애)은 청산회 회원도 아니고, 단 한 번도 행사에 나온 적이 없다. 더군다나 후원을 하지도 않았다”라며 양당선인 모녀와 청산회가 무관함을 역설했다.
그렇다면 청산회는 도대체 어떤 조직일까. 청산회를 처음 기획한 것은 노회장이다. 그는 서대표가 한나라당 대표 시절 정무특보를 맡은 핵심 최측근이다. 지난 2004년 1월 불법 대선 자금 문제로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나 칩거 중이던 서대표에게 지난 2006년 초 산악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조직이었던 ‘민주산악회’를 벤치마킹했던 것. 하지만 서대표의 첫 반응은 “그게 제대로 되겠느냐”라며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청산회 깃발을 들고 청계산을 오른 것은 2006년 6월24일. 서대표는 불참했다. 당시 노회장을 비롯해 이번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서준영씨(서울 마포 을), 김세현씨(부산 해운대·기장 을) 등 30여 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하산 후 막걸리 잔을 돌리며 조촐한 창립대회를 가졌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결의했다. 매달 넷째 주 토요일에 산행을 한다는 것. 그리고 산행 때마다 한 사람씩 더 데려온다는 것. 그렇게 해서 2차 남한산성 등반 때는 70여 명이 참가했다. 서대표가 처음으로 청산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백여 명이 모였던 그해 9월 관악산 등반대회 때였다. 당시 서대표는 잔뜩 고무되었고, 흥에 겨워 노래까지 불렀다. 10월에는 청산회 마크가 새겨진 단체 등산조끼도 맞추어 입었다. 이때는 5백여 명이 수락산을 올랐다.
그러면서 청산회가 무시할 수 없는 세를 과시하게 된 것은 그해 12월 서울 하림각에서 열렸던 ‘송년의 밤’에서였다. 노회장은 “처음에는 5백명을 예약했는데 오겠다고 한 사람들이 많아 예약자가 1천명으로 늘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않게 그날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1천7백32명이나 되었다”라고 회고했다. 김영선·이강두·이규택·박진 등 현역 의원만 32명이 참석했다. 한나라당 대선 예비 주자였던 이명박·박근혜·손학규 후보 등도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서대표가 “우리끼리 행사를 치르겠다”라며 거절했다.
 

박 전 대표, 지난해 초 서대표 집 비밀리 방문해 도움 요청

그런데 오늘날 친박연대까지 오게 한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다음해인 2007년 3월24일 계룡산 동학사 주차장에서였다. ‘청산회 시산제’에 전국에서 무려 5천여 명이 운집했다. 동학사 주지 스님도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등반대회를 할 때도 3천명이었는데…”라며 놀라워했다는 후문이다.
당시 박근혜 전 대표의 측근인 문희 의원이 카메라로 현장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리고 3월26일 박 전 대표에게 사진을 보이며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거기서 박 전 대표는 서대표를 자신의 우군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일까. 이후 박 전 대표는 서대표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몇 차례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했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저녁 박 전 대표는 서대표의 자택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박 전 대표는 “대표님께서 저를 정치에 입문시켜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대통령까지 만들어주십시오”라며 전폭적인 지원을 요청했다는 것이 노회장의 전언이다. 이에 서대표는 장고에 들어갔고, 마침내 4월9일 오후 박 전 대표의 여의도 캠프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시 서대표는 “2002년 대선의 패장(서대표)으로 한나라당을 기우뚱하게 만들어 박 전 대표에게 빚이 있다. 이제 나는 박 전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모든 정성을 다해 빚을 갚으려 한다”라며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최선봉에 섰다. 하지만 8월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 전 대표는 석패했다. 이후 박 전 대표는 자신의 지역구인 대구 달성을 두 차례 방문한 것 이외에는 대중 앞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 두 달 만에 대중 앞에 섰다. 바로 지난해 10월27일 청산회 회원 7천여 명이 참여한 경기도 양평 용문산 등반대회에서였다. 경선 이후 처음으로 대중 연설을 하면서 박 전 대표는 “어린이가 부모 사랑받으면서 자라듯 여러분의 사랑을 받는 저도 마음을 무럭무럭 키워서 사랑에 보답하겠다”라며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곳곳에서 ‘박근혜 대통령’ 연호가 터졌다.
청산회 회장 임기는 2년. 따라서 창립된 지 2년이 되는 오는 6월에 새로운 회장을 선출하게 된다. 부회장단 10여 명, 자문위원 10여 명, 고문단 5명이 모인 회장단 회의에서 결정된다. 현재 호남 지역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1백40여 개 지회가 활동하고 있다. 등반대회 때마다 회원들에게 1만~2만원씩 걷어 운영되고 있으며, 부족한 비용은 회장단에서 십시일반 갹출하고 있다는 것이 노회장의 설명이다. 
‘서청원을 사랑하는 사람들’ 30여 명이 모여 첫발을 내디딘 청산회. 불과 2년 만에 7만명으로 회원 수가 불어나면서 서대표의 준(準) 정치조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여기에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박근혜 전 대표의 친위부대로 자리매김했다. 그래서 향후 박 전 대표의 대권 가도에서 청산회가 할 역할과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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