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 죽지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 승인 2008.04.2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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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 회장은 왜 자신의 일선 퇴진이라는 전격적인 카드를 꺼냈을까. 또 앞으로 그의 행보는?

 
1987년 삼성그룹 회장직에 취임한 이건희 회장이 ‘이건희 스타일’을 본격적으로 선보인 것은 6년 후인 1993년 자동차·유통·영상 사업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이른바 ‘신경영’을 선포하며 그룹 경영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오전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의 7/4제도가 시행된 것도 이때였다. 이회장은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다 바꾸어보자’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성장의 개념을 ‘양적’이 아닌 ‘질적’ 성장으로 규정했다. 아울러 국제화와 복합화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이회장은 이러한 자신의 메시지를 그룹 경영층에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룹 수뇌진을 이끌고 짧으면 2~3일, 길게는 1주일씩 일본, 유럽, 미국 등에서 잇달아 전략회의를 개최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해외에서 메시지를 반복해 설파한 이유는 국내에서 했다가는 너무 많은 관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이회장의 경영 메시지 전파 행보는 비서실이 거듭된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전에 효과 등을 꼼꼼히 점검하고 회장에 대한 반복 학습 등을 통해 어느 정도는 연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한 번 매달리면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는 이회장 자신의 성격에다 외부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그룹 내의 독보적인 그의 위상이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회장은 1993년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휴대전화 단말기 판매 부진과 관련해 해당 임원들을 향해 ‘좋은 인재들을 붙여주었는데도 제대로 일도 못하는, 버러지만도 못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적나라하게 질타했다. 해당 임원은 회의 중간에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사표를 썼으나 주위의 만류로 거두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휴대전화 단말기 사업을 책임졌던 임원은 2년 뒤인 1995년 국내 1위였던 모토로라를 꺾고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으며,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이회장에게 읍소했던 제조 담당 이사보 이기태씨는 훗날 이회장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애니콜을 글로벌 브랜드로 끌어올렸다. 이러한 이회장의 직접적인 리더십이 조직 전체를 자극해 삼성의 전체 경쟁력을 한두 단계 끌어올린 요인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회장은 이러한 리더십으로 삼성이 만드는 반도체, 초박막 트랜지스터 액정표시 장치(TFT-LCD), 모니터 등을 세계 1위 제품으로 진입시켰다. 이회장의 발언들은 동영상에 담겨져 국내외 전 사업장에서 삼성의 아이덴티티를 강화하는 교육 교재로 최근까지도 쓰였다.
 

신경영이 주창되던 1993년은 정치적으로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부 독재가 끝나고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문민 정부의 임기가 시작되는 첫 해였다. 대우그룹은 국내에서의 경쟁을 피해 독자적으로 자동차 업종 중심의 이른바 ‘세계 경영’을 전개할 때였다. 이후 삼성의 ‘신경영’과 대우의 ‘세계 경영’이 한동안 비교되기도 했다.
1987년 창업자인 선대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면서 3남인 이건희 부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승계한 지 만 5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그 기간 동안 선대 회장의 창업 동지들이 대부분 그룹을 떠나 일정 수준 이상의 인적 물갈이가 이루어진 뒤부터 이회장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은둔의 경영 스타일, 일본 유학 시절 경험에서 비롯”

이회장은 오랫동안 치열한 후계 경쟁과 혹독한 경영 수업을 거쳤다. 이병철 회장의 셋째아들인 이회장은 위의 두 형이 경영 능력 검증에서 탈락한 뒤에 후계자로 지목되어, 서른여섯 살인 1978년에 부회장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부친의 별세로 회장직을 이어받기까지 다시 9년 동안 선대 회장의 창업 동지들로부터 경영 수업을 받았고, 후계자 시절에는 회사의 경영 참여가 배제된 채 인고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이회장은 취임 뒤 선대와는 다른 스타일의 경영 방식을 선보였다. 태평로의 그룹 본관보다는 자신의 한남동 집에서 그룹 경영을 하는 경우가 많아 ‘독특하다’는 평을 들었다. 이회장은 올빼미 스타일이다. 어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만사 제쳐놓고, 밤을 새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전문 서적들을 탐독했고, 영상물들을 통해 지식을 축적했다.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한 이후 이회장은 자신이 보던 수백 권의 외국 자동차 전문 잡지를 계열사인 중앙일보 자동차 담당 기자에게 내주었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회장의 성격 형성이나 경영 의사 결정 과정을 그의 성장기에 비추어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로 언론인인 ㅊ씨는 “이병철 선대 회장이 아들을 일본과 미국에 유학 보냈는데, 제대로 챙겨주지를 않았다. 이회장은 자신이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혼자서 무언가를 해결하는 버릇이 생겼다”라고 증언한다. 은둔의 제왕, 침묵의 경영자라는 별칭이 붙여진 것도 일본 유학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회장은 집에서 생활하면서 도쿄 유학 시절부터 애용했던 일본풍의 실내 옷을 즐겨 입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평범한 일상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87년 이건희 회장 출범 초기 비서실에서 선대 회장을 모셨던 임원 ㅈ씨가 이회장을 태평로에서 보기 힘들게 되자 “정시에 출근해서 정시에 퇴근하셔야죠”라고 직언했다가 계열사 도쿄 지점장으로 쫓겨났다.
이회장의 재택 경영은 각종 최신 사무기기와 통신망, 자료실 등의 현대적인 시스템 외에도 안정적으로 집무를 볼 수 있는 인적 인프라가 있어서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이회장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비서나 집사들의 권한 또한 막강한 것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단적인 사례가 있다. 10여 년 전쯤 어느 주말에 이회장의 여비서가 일본 도쿄의 삼성재팬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사장을 호출했다. 당시 당직 근무를 하던 중간 간부가 업무 준칙대로 여비서에게 대응하는 과정이 길어지자 여비서 옆에 있던 이회장이 전화를 넘겨받는 일이 벌어졌다. 훗날 이 직원은 본국으로 소환되어 계열사 수도권 지점에서 한동안 근무하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계열사로 알려지면서 각 계열 사장들은 이 여비서와 통화를 할 때 신중하게 대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여비서는 ㅂ씨(48)로 미혼이며, 전문대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ㅂ씨는 이회장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수행 비서다. ㅂ씨는 전략기획실 임직원들조차 얼굴을 아는 이가 드물 정도로 베일 속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편 ㅈ씨에 대한 지점장 인사 조치는 그 뒤 ㅈ씨가 삼성재팬 대표가 되면서 “직언을 하는 부하 직원은 키운다”라는 이회장의 생각을 실천한 계획적인 인사였음이 드러났다. 그는 삼성재팬의 사장에서 물러난 뒤 계열 인력개발원의 상담역을 거쳐 현재는 이재용 전무의 e삼성 사업과 관련이 있던 한 법무법인에 재직 중이다. 이회장과 ㅈ씨는 비슷한 면이 많다고 한다. 둘 다 독서광이고, 메모광이다. 많은 아이디어와 지식을 책에서 얻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동차 사업 실패로 시련…“퇴출 비용 오산해 이중 피해”

이회장의 뼈아픈 실패작은 뭐니뭐니 해도 자동차 사업으로 기록될 것 같다. 이회장이 ‘SM5’를 직접 작명하는 등 애착을 가졌음에도 자동차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삼성자동차가 기본부터 문제를 안고 출발했다고 보고 있다. 현대차 출신의 전문가들을 영입했으나 삼성의 경영진들은 이들에게 실권을 주지 않았다. 공장 생산 라인의 설계 도면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시공사인 삼성건설측에서 회장의 공장 방문 일정을 맞추기 위해 공사 일정을 강행하는 등 무리수를 두었으며, 연약한 부지인 공장 전체 면적에다가 강화 파일을 시공해 수백억 원을 날리는 등 형식과 외양에만 신경을 썼다. 결국 1998년 SM5 첫차를 출시할 때 삼성자동차는 이미 그로기 상태였다.
기아차 인수와 겹쳐진 자동차 사업 포기 과정에서도 실책은 이어졌다. 당시 구조조정본부(구조본)의 기획 라인은 퇴출 비용으로 4조원을 잡아야 현실성이 있다고 주장했으나 이 의견은 무시되고 이학수 부회장의 재무 라인이 제시한 삼성차 자본금 수준인 1조원의 퇴출 비용안이 받아들여졌다. 이후 실제로 삼성자동차 퇴출 비용은 7조원대로 추산되어 기아차를 인수해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 나았다는 뼈아픈 교훈만을 안은 채 삼성그룹 최초로 삼성차를 법정 관리 신청하는 불명예를 안고 사업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아직도 삼성차 문제는 부채 처리와 관련한 법적인 정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다.
부친이 전경련을 만들었지만 이회장은 전경련 회장 제안을 번번이 고사하고 대외 활동을 하지 않았다. 다만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직은 받아들였다.
그는 1995년 한 번의 재수 끝에 IOC 위원에 선임되었다. 당시 이회장은 그룹 임직원들에게 IOC 위원 선임을 기념해 간단한 선물을 배포할 정도로 좋아했다. 이회장의 IOC 위원 선임에는 김운용 당시 IOC 위원이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비서실은 이회장의 위원 선임을 위해 김위원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알려진 바로는 김위원에 대한 지원이 삼성이 버거워할 정도로 막대했다고 한다.
이후 이회장은 IOC 일에 전념하기 위해 후계 구도를 빨리 정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한동안 IOC 일에 열심이었으나 너무 잦은 국제 행사 참석 등으로 힘들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는 IOC 위원이 된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게 되었다는 말까지 나오면서 후계 구도 얘기는 쑥 들어갔다. 1999년 이회장은 폐 근처의 림프절에 암세포가 발견되어 수술을 받았으며 이때도 후계 구도에 관한 얘기가 나돌았다. 하지만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회장은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이재용 후계 체제는 오히려 이번 특검 수사 발표로 인해 더욱 구체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삼성의 ‘4.22 경영 쇄신안’ 발표가 삼성전자 이재용 전무로의 안정적이고 무리 없는 경영권 승계와 함께 향후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에 선처를 바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다.
삼성의 대외협력 업무를 오랫동안 담당한 한 인사는 “이재용 전무를 해외에 근무하게 한 것은 재판 과정 중에 이전무에 대한 말들이 시중에 회자되는 것을 피하게 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한다.

“이전무 해외 근무는 이회장이 직접 내린 결정일 것”

 

삼성 안팎에서는 이회장 자신의 사퇴와 이전무의 해외 근무는 오너인 이회장이 직접 내린 결정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우선, 이회장이 진정으로 경영에서 물러났는가 하는 문제는 외형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삼성 전략기획실 비서팀에서 근무했던 아무개씨는 “향후 실제 내용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이회장의 라이프스타일이 특별히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이회장이 일반인들의 출근 개념에 준하는 일은 애초에 하지 않았고, 삼성전자 대표이사직에서 사퇴한다고 했으나 삼성전자 대표이사 자격으로 경영 행위를 한 적이 그전에도 없었다”라면서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을 비쳤다.
다만 그는 “회장님은 구질구질하지 않다. 하면 하고, 안 한다면 하지 않는 분이다. 특검에 출두하는 과정에서 한 말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 같다. 회장님은 복선을 깔거나 재주 부리는 일이 없다”라고 강조했다.
이건희식 경영을 얘기하면서 이학수 부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삼성 안팎에서는 이학수 부회장 라인을 중심으로 한 재무 부문에 힘이 쏠리게 된 것에 대해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 환경 변화로 인한 관리 경영의 필요성과 아울러 이회장의 재무·금융·회계에 대한 부족함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학수 부회장을 정점으로 한 삼성의 재무 라인은 미국 유학파이자 구조본에서 고위직을 지낸 ㅎ씨 등 다른 그룹 내 재무 라인들로부터는 “전략이 없는 회계를 한다”라는 비아냥을 들어야만 했다. 돈 관리만 하는 것은 재무가 아니라 회계라는 것이다.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논란의 핵이 되고 있는 에버랜드 전환사채 건은 당시 삼성증권 실무진과 협의하던 김인주씨가 상급자들에게 설명하기에 복잡한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피해 보편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기 쉬운 전환사채(CB)를 선택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당시 김씨와 협의했던 삼성증권의 아무개씨는 “당시 BW는 정부가 인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금융 기법이었다. 코오롱은 BW를 발행해 이웅렬씨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는 작업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결과론이지만 당시의 상속법에 따라 정상적인 상속을 했으면 이재용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오너의 세금을 줄여주겠다는 과잉 충성 때문에 오히려 모든 일이 꼬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부회장은 선대 회장 시절에 근무했다가 퇴임한 그룹 원로들을 잘 챙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년에 한두 번은 안양 베네스타 골프장으로 이들을 초청해서 그룹 경영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선물을 한 보따리씩 안기는 등 자신의 평판 관리나 회장의 대외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썼다. 이러다 보니 이들 고위 퇴임 임원들로부터 이학수 체제를 비판하는 불만의 소리가 공식적으로는 새어나오지 않았다.
이부회장에 이회장의 대한 절대적인 신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9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하면서부터다. 유치 작업에 직접 뛰어든 이회장은 이부회장의 막후 작업만을 믿고 동료 IOC 위원들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으나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유치 실무 총괄을 맡았던 이부회장과 해외 직계 라인들의 판단에 문제가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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