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비우고 곳간 채우려나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08.05.2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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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북핵 문서’ 넘겨받은 후 식량 원조 재개 나서…테러지원국 해제도 논의 시작

ⓒ연합뉴스
미국이 북한에 식량 원조를 재개한다. 빠르면 오는 6월부터 시작해 50만t 정도의 밀과 옥수수를 보낼 예정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한국 정부가 북한 주민의 주식인 쌀을 실어 보낸 것과는 사뭇 다르다. 원조 곡물치고는 격이 한 단계 낮은 셈이다.

그러나 한국 문제 전문가 마커스 놀란드는 미국의 밀과 옥수수가 쌀보다 오히려 한 단계 높은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대북한 원조 식량의 경우 콩을 원료로 한 단백질 비스킷, 보리 또는 다른 잡곡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놀란드가 이렇게 저급한 식량을 북한에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김정일 정권에 대한 강한 불신을 담고 있다. 이 불신은 이전의 한국 정권들처럼 쌀을 보낼 경우에 지원 식량이 굶어 죽어가는 북한 주민과 노약자에게 배급되는 것이 아니라 북한 고위층이나 군부의 배만 불리는 데 사용되리라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흰쌀밥을 좋아하는 북한 고위층 대신 꼭 필요한 사람에게 식량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쌀보다 보리나 잡곡을 보내는 것이 옳다고 역설한다.

미국이 공급하는 밀과 옥수수가 어떤 계층의 북한 사람들에게 돌아갈지 알 수 없다. 어림 짐작으로 밀(또는 밀가루)은 고위층, 옥수수(옥수수 가루)는 허기진 주민에게 배당될 것이다. 북한에 들어가는 이번 원조 식량의 배급 상황을 점검하게 될 미국의 에머슨 트러스트 같은 비정부기구(NGO)의 감시가 얼마나 철저하느냐에 따라 그 답이 나올 것이다.

미국 국무부 “북한에 1994년 못지 않은 식량 위기 닥친 듯”

미국의 대북한 식량 원조는 지난 2005년 이후 3년 만이다. 미국은 지난 1994년 북한과 함께 서명한 제네바 기본 합의서 발효 이후 매년 다량의 에너지와 식량을 북한에 공급했으나 지난 2005년 이를 중단했다. 미국의 대북한 원조 채널로 이용한 세계식량기구(WFP)가 북한의 식량 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다고 전한 데 따른 것이다.

이후 3년 간은 한국 정부가 상당 부분 미국의 대역을 맡았다. 김정일 위원장이 남측의 대통령을 두 차례나 평양으로 불러 만난 배경에는 이런 역할 변화가 깔려 있다는 설명도 그래서 나온다.

미국 국무부의 매코맥 대변인은 지난 1994년 당시의 식량 위기에 못지않은 또 다른 식량 위기가 북한에 닥쳐온 것 같다고 말하고 북한은 올해 적어도 1백46만t의 식량 부족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미국측에서는 6월부터 식량 수송을 시작하면 내년 봄 보릿고개 이전에 북한에 몰아닥칠 식량 대란의 급한 불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다. 북한도 지금부터 식량 확보를 하지 않으면 내년 봄 극심한 지경에 직면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북한의 최우선 과제는 식량 확보라고 최근 밝힌 바 있다. 이는 평양 방송이 김위원장의 말을 인용한 발표에서 나온 것이다. 북한의 식량 사정이 얼마나 다급한지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지난 1994년을 전후한 식량 위기 때 북한 전체 주민 2천3백만명 가운데 거의 10%에 육박하는 2백만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워싱턴의 외교가와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제네바 기본 합의서에 서명한 것도 식량난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미국의 빌 클린턴 정부는 대북한 군사력 동원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북한은 전쟁은 두렵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식량 부족으로 인한 주민 아사 상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북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북한 식량난은 북한 핵 문제의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척도나 다름없다. 북한이 식량 위기를 어느 정도 해소한 지난 2000년대 초반 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어기고 핵개발 재개를 시도했다. 핵개발 재개 이유는 미국이 기본 합의서에 명시한 식량과 에너지 공급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5월 들어 북한 핵문제는 다시 급물살을 타고 있다. 북한은 지난 1986년부터 시작한 핵개발 계획을 담은 1만8천여 페이지 분량의 기록 문서 사본을 미국에 넘겼다. 미국 정부는 지금 이들 문서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무부 관리들은 일단은 믿을 만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문서 전달과 함께 미국측에서는 식량 원조 재개가 본격적으로 검토되고 있고 북한을 국무부의 테러지원국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테러지원국 리스트에서 제외되는 것은, 북한이 미국은 물론 국제 사회의 경제 지원과 협력을 얻어내는 지름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북한은 지난 5년간 이어지고 있는 6자회담에서 형제국으로 믿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으면서도 핵폐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여름 북한의 작황이 나쁜 것이 확인되고 올해부터 식량 문제가 다시 심각해질 위기에 처하자 입장을 바꾸었다. 북한은 지난 10월 싱가포르에서 가진 북·미 회담에서 전격적으로 핵폐기 절차에 대해 동의했다.

북한에는 최근 더 심한 악재가 덮쳤다. 중국 쓰촨성의 대지진으로 수만 명의 희생자와 수백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북한이 가장 믿고 기대는 중국도 이재민 구호와 피해 복구 사업 때문에 더는 북한을 지원할 형편이 못된다. 그래서 중국 쓰촨성 지진이 발생한 것이 지난 5월12일이고, 북한이 미국에 핵개발 기록 문서를 넘긴 것이 이틀 뒤인 14일이라는 사실을 놓고 모종의 인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나오기도 한다. 더구나 북한이 기록 문서를 미국에 전달한 그 자체가 북측으로서는 커다란 양보라고 볼 수 있다.

ⓒAP연합

“북한 핵은 식량 문제로 보면 간단하다”

북한의 적극적인 대미국 접근은 이미 베이징의 6자회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북한은 미국에 핵개발 기록 문서를 넘기는 대신 회담 주최국인 중국에게는 핵폐기 선언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의 대미 접근이 활발해지자 한국은 통미봉남(通美封南)을 우려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을 하고 있을 당시 한승수 총리는 북한이 한국을 제치고 미국과 손잡는 것은 그냥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북·미의 직접 대화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1992년부터 북·미 핵협상을 지켜본 미국의 한 관측통은 “북한 핵은 식량 문제로 보면 간단하다”라며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는 이런 비유도 남겼다. 집 부근에 있는 호수를 산책할 때 많은 오리들이 주위에 몰려든다고 한다. 사람들이 산책할 때 매번 먹이를 들고가 오리들과 친해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리들은 하루 이틀 먹이를 가지고 가지 않아도 접근하지만 사흘만 먹이를 거르면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는 “북한의 핵 정책은 오리들처럼 매우 자연스럽고 야생적이어서 식량 문제로 관리가 가능하다”라고 평가했다.

이는 북한 핵이 식량 원조가 계속되는 한 항상 폐기와 재개의 선에서 주목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핵과 식량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 한 북한 핵문제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보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북핵은 결국 남북이나 북미 접근의 단순한 국가 관계 차원이 아니라 먹을거리 차원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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