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ᆞ15 공동선언과 10ᆞ4 선언에 대한 입장 확고히 하라
  •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 승인 2008.06.1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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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유환(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남북이 ‘6·15 남북 공동선언’을 채택한 지 8주년을 맞았다. 6·15 공동선언의 핵심은 공존이다. 6·15 공동선언은 대립·갈등의 남북 관계를 화해·협력, 공존·공영하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한 ‘정치 선언’이다. 이 남북 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선언을 현실로 뒷받침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남과 북이 반세기 이상 지속해왔던 ‘적대적 의존 관계’를 청산하고 ‘호혜적 협력 관계’로 발전시키는 데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다. 6·15 공동선언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통일 방안의 공통성 인정과 관련한 통일 논쟁, 북한의 변화 여부 논쟁, 대북 지원과 관련한 ‘퍼주기’ 논란 등으로 ‘남북 화해 시대의 남남 갈등’이라는 역설이 형성되기도 했다.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정에서 신·구 패러다임 간에 첨예한 갈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과거 부정은 협상 상대에 대한 부정을 의미

6·15 공동선언에 이어 지난해 10·4 선언이 만들어짐에 따라 남북 관계가 한 단계 진전될 수 있는 연결고리는 마련되었다. 북한은 노무현 정부 임기 말에 남북 관계 급진전을 시도했다. 북한이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에서 10·4 선언을 통해 남북 관계의 진전을 모색한 것은 남측에서 새 정부가 출범할 것을 의식한 조치로 볼 수 있다. 10·4 선언과 이후의 합의 사항 대부분은 새 정부가 이행할 내용이다.

북한은 남측에 들어설 새 정부와 관계를 재설정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곧바로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의도로 노무현 정부 임기 말에 다양한 측면에서의 남북 합의를 이루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정부 임기 중 정상회담을 한 차례도 하지 못하고 정권 교체가 이루어질 경우 6·15 공동선언이 사문화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남북 정상회담에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정권 교체를 통해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지난 시기를 ‘친북 좌파 정권의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고 이전 정부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 임기 말에 있었던 남북 간 일련의 합의를 남북 관계의 ‘대못질’로 인식하고 선별적 이행 의지를 밝혔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측 정세를 관망해오던 북한이 대남 비난을 본격화한 것은 3월26일 통일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대한 언급이 없는 데 대한 불만의 표시로 보인다. 즉, 북측의 불만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측 정부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대해서 명백한 입장을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부 업무보고 과정에서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국제 규범을 벗어난 북한의 예외주의적인 행동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북한은 남측이 남북 기본합의서 정신을 강조하면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관해 언급을 하지 않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는 남북 기본합의서의 주용 내용을 남측이 제안한 것이고, 1991년 당시의 사회주의권 붕괴 등의 위기 의식을 반영해 수세적으로 기본합의서를 수용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은 이에 대해 남측이 강조하는 것을 거북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관한 남측의 입장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남북 관계의 의미 있는 진전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두 선언은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서명한 문서로 남측이 이를 무시할 경우 김정일의 ‘통일 지도자상’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리더십 위기로 발전할 수 있다. 북한이 식량난 등으로 남측의 도움이 절실한 시점임에도 대남 비난을 강화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김정일 위원장이 서명한 두 선언에 대해서 남측이 무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2000년 6월14일 밤 평양 목란관 만찬에서 남북공동선언문 서명에 앞서 맞잡은 손을 들어올려 참석자들의 박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는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북한 체제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두 선언에 대한 남측의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과거 정권들이 당시의 시대정신과 요구를 반영해서 남과 북이 합의한 문서들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합의를 도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의 경우 합의한 당시의 정부들도 합의 내용을 그대로 이행하지 못했고, 곧바로 이행하기 어려운 합의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합의문을 만들고 이행하면 된다. 새로운 합의를 만들려면 먼저 남북 간에 이미 합의한 문서들을 이행한다는 전제가 서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를 부정할 경우 신뢰를 가지고 새 합의를 할 수는 없다.

북측은 지금까지 김일성·김정일 두 지도자가 통치해왔기 때문에 과거 부정은 협상 상대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이명박 정부가 김정일 정권과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려면 과거 합의문에 대한 이행 의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조건 없는 대북 식량 지원 추진하면서 관계 풀어나가야

지금까지 통일부가 밝힌 두 선언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실천 가능한 이행 방안을 검토해나가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김하중 통일부장관은 4월30일 국회 상임위 발언에서 “남북 간 합의 중에는 7·4 공동성명, 남북 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6·15 선언, 10·4 선언도 있는데 이행되지 못한 것도 많다”라면서 “우리로서는 앞으로 현실을 바탕으로 해서 상호 존중의 정신 아래 남북 간 협의를 통해 실천 가능한 이행 방안을 검토해나가기를 기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교착된 남북 관계를 풀려면 이명박 정부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대해서 이행 의지를 밝히고, ‘비핵·개방 3000’ 구상의 재구성과 실용주의 대북 정책을 구체화해나가야 할 것이다. 비핵·개방 3000 구상은 대선 과정에서 제시한 대북 정책 공약으로 야당 시절 집권 세력의 대북 정책과의 차별화를 위한 공약일 수 있으나, 집권 이후에는 실행력이 높고 북측의 거부감이 적은 실용주의 대북 정책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비핵은 강력히 요구할 수 있는 사항이지만, 개방과 3천 달러 시대 개막은 북한이 선택할 사항으로, 북측이 이를 내정 간섭으로 인식하고 있는 등 북측의 반발이 심한 대북 구상이다. 북한은 비핵·개방 3000 구상을 흡수통일 방안으로 인식하고 강한 경계심을 보이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거의 매년 관례적으로 지원해오던 대북 식량 지원도 중단된 상태다. 최근 우리 정부가 옥수수 5만t을 지원하겠다고 표명했음에도 북한은 묵묵부답이다. 미국은 50만t의 식량을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서 북한에 지원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미 관계가 진전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북 관계는 교착 국면을 지속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때 나왔던 ‘통미봉남(通美捧南)’이란 용어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 관계 우선론에 따라 한·미 동맹이 강화되면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도 잘될 것이라고 낙관론을 폈지만 남북 관계는 풀리지 않고 있다.

최근 통일부 당국자는 “정부의 대북 정책은 핵문제 해결과 남북 관계 발전을 병행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 구상이 ‘선 핵폐기 후 협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김하중 통일부장관도 6월12일 6·15 공동선언 8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 남북 관계를 촉진하기 위해서 조건 없는 대북 식량 지원을 추진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교착 국면을 풀기 위해서는 북핵 해결 프로세스와 남북 관계 전반을 재검토한 후 북한과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을 모색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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