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회담 판문점 제안, 북한측이 반대해 무산”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08.06.2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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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측 15억 달러 요구, 단호하게 거절 / 금수산기념궁전 참배는 김정일 지시로 모면

ⓒ시사저널 황문성

박지원 의원은 6·15 남북정상회담의 주역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문화관광부장관으로 있던 2000년 대북 특사로 북한측과 직접 접촉해 불가능해 보였던 회담을 성사시킨 주인공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북송금 특검을 받고 구속되는 비운을 겪기도 한 그는 지난 4·9 총선에서 전남 목포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그는 남북 관계에 획기적 발전을 가져온 6·15 정상회담을 이끌어낸 데 대한 자부심은 여전했다. 이명박 정부도 ‘햇볕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정상회담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눈빛이 번득였다. 한 호텔 로비에서 고 정몽헌 회장을 만나면서 시작된 ‘역사적 사건’의 막전막후를 들려준 그는 촌각을 다투었던 대북 특사 시절로 되돌아가 있었다. 예비회담을 베이징이 아닌 판문점에서 하자고 북한측에 제안했던 일 등 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비화도 털어놓았다. 인터뷰는 6월1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615’호에서 1시간 20분가량 진행되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 여론이 좋지 않다.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쇠고기 협상 문제가 발단이 되었지만 현재 정국을 총체적으로 보면 이명박 정부가 ‘잃어버린 10년’만 주장하고 ‘변화된 10년’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인수위 그리고 취임 후 인사를 필두로 해서 모든 정책들이 국민의 기대와 동떨어져 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된 점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햇볕 정책에 대한 생각이 똑같다고 여러 번 반복해서 밝혔다. 취임 후 미국 방문에서도 그렇게 말을 했다. 대선 과정이나 집권 초기 강경 노선을 걸었지만 결국에는 햇볕 정책밖에 없기 때문에 방향 전환을 할 것이다.

북한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지원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상대방이 필요로 할 때 도와주는 것이 가장 좋다. 동족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도와달라고 요구해라’는 식의 불필요하고 자존심 상하게 하는 조건은 접어야 한다. 쌀과 비료 지원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옥수수 지원은 북한측에서 거부했다.
남북 문제는 남한측의 눈높이로 북한측을 바라봐서도, 북한측의 눈높이로 남한측을 바라봐서도 안 된다. 민족의 눈높이로 바라봐야 한다. 북한측도 그렇게 경직된 눈높이로 우리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 남북 교류 협력을 반대하는 극우·보수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6·15 정상회담을 고 정몽헌 회장이 처음 제안했다고 밝혔다.
2000년 초에 한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정몽헌 회장을 만나 차를 한 잔 했는데 정회장이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이 있다. 주선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 안을 김대중 대통령께 보고드렸고, 대통령께서도 관심을 표명해 정회장과 함께 추진을 하게 된 것이다.

정상회담 성사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 같다.
매일 국회에서 만나는 여·야 협상도 쉽지 않은데 전쟁을 겪은 후 분단 반세기만에 특사가 만나 좋은 일만 있었겠나.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가 오고 이산가족이 상봉하고 통일을 준비한다는 각오로 임했다. 북한측 특사인 송호경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도 상당한 성의를 보였다. 난관이 있었지만 극복했다.

북한측에서 현금 15억 달러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처음에는 ‘과감하게 지원을 해달라’고 했다. 구체적인 금액 이야기는 안 나왔다. 현금 지원 이야기를 하기에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우리 국민 정서도 그렇고 현실 정치도 그렇다’라고 하니까 ‘15억 달러 정도 해준다고 뭐가 문제가 되겠느냐’라고 구체적인 액수를 말했다. 예산 절차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거절했다. 나중에 정몽헌 회장을 불러 ‘어떻게 정상회담 주선을 하면서 실정법상 불가능한 현금 지원 이야기가 나오게 하느냐’라고 불만을 털어놓았고 정회장도 이에 공감을 표했다.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
회담 추진은 현금 지원 때문에 일단 결렬 상태였다. 한참 있다가 4월8일에 베이징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정몽헌 회장과 국정원 간부, 북한측 인사들이 접촉을 가졌다는 것을 이후에 확인했다.
정회장이 새벽 4시인가 5시에 정주영 명예회장을 찾아가 ‘북한에서 15억 달러를 요구했는데 7가지 사업권의 대가로 5억 달러로 계약을 했다’라고 보고한 것도 이익치 회장이 특검에서 진술해서 알게 되었다.

그러면 5억 달러는 4·8 합의서와는 별개의 민간 지원이라는 것인가.
현대가 사업승인서를 제출했는데 대통령께서 ‘이렇게 중요한 항공·해운·통신·철도 등 기간 산업을 현대만 독점으로 북한에 진출할 수 있냐’라며 불허했다. 이후 현대에서 여러 기업들이 참여하는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참여하겠다고 조정해 제출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현금 지원 문제 이외에 걸림돌은 없었나?
남북 정상의 역사적 상봉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정상회담은 북한 헌법상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면 누가 인정을 하겠나. 그래서 합의서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한다는 내용을 적시하자고 했는데, 북한측은 어떤 경우에도 김위원장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서울에 전화해서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하니까 ‘박장관이 잘 알아서 판단하라’고 위임을 하는데 나로서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그리고 북한측에서는 일정을 주지도 않았다. 김위원장의 일정은 자신들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국가 원수가 만나는데 합의문 초안은 나와야할 것 아니냐고 하니까 ‘잘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합의문을 만들자고 이야기하느냐’고 하더라.

그래서 예비회담을 갖기로 했다. 처음에는 내가 판문점에서 하자고 제안을 했다. 북한측 판문각과 남한측 자유의 집을 오가면서 하자는 것이었는데 ‘미 제국주의자들이 분단을 만든 곳에서는 못한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베이징에서 하자고 해서 좋다고 했다.
송호경 특사가 헤어지면서 ‘상부에 보고할 테니까 오늘 접촉한 것을 서로 밝히지 맙시다’라고 해서 상하이 회담을 1차 예비회담으로 하기로 했다. 그때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싱가포르 회담을 숨긴 것은 민족과 국익 그리고 외교 관례를 위해서였다.

금수산기념궁전 참배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나?
협상 당시에는 참배 문제에 대해 말이 없었다. 북한측에서는 평양에 방문하면 당연히 참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안 물어보니까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 직전에야 북한측에서 참배를 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다 언론에 순안공항에서부터 평양까지 이동 예상 경로가 보도되는 바람에 하루 늦게 13일 출발하게 된 것이다.

평양에 도착해 밤 10시께에 인민궁전에서 송호경 특사를 만났는데 ‘참배를 해야 한다’고 계속 압박을 했다. ‘나와 한광옥 비서실장이 대신하고 서울에 돌아가서 구속당하겠다’고 버티니까 자정이 지나서 ‘상부에 보고 하겠다’고 해서 헤어졌다.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에 오니까 대통령께서도 안 주무시고 계셨다. 잘될 것 같다고 보고드렸다. 다음 날 아침에 송호경 특사가 아침을 먹자고 연락이 와서 나가니까 ‘장관 선생의 열정을 상부에 보고했더니 장군님께서 참배 안 해도 좋다고 하셨다’는 낭보를 전해주었다.

순안공항에 김정일 위원장이 나와서 남북 정상 간 역사적인 상봉이 이루어졌다. 이제는 정상회담이 어떻게 되느냐가 걱정이었다. 그런데 김위원장이 ‘대통령님, 겁도 없이 오셨다. 우리 간부들이 공항에 나가지 말라고 말렸는데 고령인 대통령님도 오시는데 내가 왜 못 가나. 여기서 편히 쉬시고 내일 회담을 하자. 빨간 불이 들어오면 새총으로 쏘고 오겠다’고 그러더라. 14일 정상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국정원 간부와 북측 인사가 합의문 작성을 했고, 임동원 원장과 김용순 비서가 조율을 했다. 만찬장에서 두 정상이 서명해 6·15 공동선언이 이루어졌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북송금 특검으로 고초를 겪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지지한다. 하지만 대북송금 특검은 대단히 잘못한 것이었다. 햇볕 정책을 이어 받는다고 하면서도 김대중 대통령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실시한 정치적 음모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시대적 상황에서 깨끗한 정치를 했고 누구도 돌멩이를 던질 수 없다고 본다. 정치 자금에는 관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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