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땅에서 유배된 슬픈 토박이들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08.07.1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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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국 17개 부족 원주민 대표들, 홋카이도에 모여 성명 제3 세계 원주민들은 초국적 자본에 시달리며 ‘비명’
ⓒ로이터 연합


“원주민의 가치는 지속 가능한 세계의 발전으로 연결되는 이치다.” 지난 7월4일 11개국 17개 부족의 원주민 대표들은 일본 훗카이도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틀 뒤에 열릴 도야코 서미트 G8 정상회담에서 자신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논의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서 고유의 가치를 빼앗겨온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원주민 대표들은 ‘원주민들의 권리 회복’과 ‘환경 보전’에 대해서 주요국의 정상들이 진지하게 논의해달라고 요청했다.

원주민들이 G8 회담이 열릴 홋카이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생존의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열강들이 식민지를 정복했던 수세기 전부터 원주민들은 주거의 자유를 잃었다. 세계인권선언문 12조는 사생활과 가정, 주거 등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주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명시했지만 원주민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원주민의 역사는 영토를 넓히려는 정복자를 피해 살아남으려는 도주의 역사, 말살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이것이 일단락된 후부터는 빈곤과 차별의 역사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지난 6월12일 캐나다의 스티븐 하퍼 총리는 100여 년 만에 이전 정부에서 벌였던 원주민(인디언·이누이트·메티스 족) 탄압 정책에 대해 사죄했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명맥을 유지해온 원주민들의 투쟁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이에 앞서 호주의 케빈 러드 총리도 지난 2월13일 국회 연설에서 원주민(애버리진)들에게 시행했던 동화 정책을 반성하고 사과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제1 세계 국가들은 정부 차원에서 원주민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주민을 말살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동화 정책이었다. 캐나다는 동화 정책을 펼치면서 원주민 공동체 자체를 말살시키려 했다. 원주민 어린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 기독교 기숙학교 등에 격리시켜 교육시켰다. 격리된 아이들은 기숙학교에서 신체적 폭력과 성적 가해 등을 당하기도 했다. 1874년부터 1970년대까지 약 100여 년 동안 격리 정책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성장한 원주민들 중 상당수는 알코올 중독과 마약에 시달리며 빈민층을 형성했다.

호주도 캐나다와 비슷하다. 1915년부터 1969년까지 약 10만명의 애버리진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 백인 가정과 선교 기관에 위탁시켰다.각종 학대에 시달리며 부모의 곁을 떠난 원주민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컸을 리 만무하다. 당시 원주민들의 평균 수명은 일반 호주인보다 17년이나 짧았고 자살률도 2배 이상 높았다. 호주에서는 강제 격리된 이 아이들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부른다.

법적인 구속력이 없고 원주민에게 물적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들 정부의 사과와 결의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1세대 국가들은 산업화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재산권을 박탈하고 쫓아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원주민에 대한 사과가 과거사 정리라는 정치적인 목적과 맞닿아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게다가 지금의 원주민들은 어느 정도 동화된 오늘날에도 사회 내의 차별과 편견을 이겨내야 한다.


원주민 말살하기 위해 어린이들 격리시켜 교육

반면 제3 세계의 원주민들은 제1 세계의 원주민들이 100년 전에 겪었던 상황을 이제야 맞이하고 있다. 싸워야 할 상대도 과거와는 달라졌다. 정부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국적 기업 등 선진국의 초국적 자본과도 상대해야 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지난해 3월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법적·제도적 대안은 원주민의 권리 확대에 큰 진보를 불러오고 있지만 아직도 그 실천에서는 문제가 많다”라고 언급했다. ILO는 “특히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브라질 북부 국경지대 등에서는 원주민의 거주지 및 환경권이 위협받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남아메리카의 대표적 원주민 중 하나인 구아라니족은 아열대 우림에 산다. 하지만 2006년에만 12명의 아이가 호흡기질환이나 영양 부족으로 사망했다. 아르헨티나 통계국의 조사에 따르면 한때 10만명을 넘던 아르헨티나의 구아라니족은 이제 겨우 4천여 명만 남은 상태다. 구아라니족의 위기는 삼림이 파괴되면서 시작되었다. 제지회사·담배회사 등이 경영하는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그들의 보금자리는 파괴되고 있다. 특히 벌채가 문제다. 벌채는 거주 환경의 변화도 가져오지만 구아라니족이 즐기던 1백50여 종의 약초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구아라니족의 족장은 “숲이 없어지면서 사냥감과 과일도 다 없어졌다. 숲을 잃으면서 약초도 없어졌다. 병원? 근처 어디에 병원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브라질의 여러 원주민들은 ‘원주민 캠프’를 구성했다. 채광 활동으로 원주민과 광업회사 간의 갈등이 커지면서 대표체 구성이 필요했다. 원주민 대표체는 브라질 정부에 ‘채광을 규제하는 법률’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 중이다. 지난 2004년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일하던 29명의 원주민이 살해되면서 원주민 사회에서 채광 규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하지만 광업회사는 원주민의 땅에 관심이 더 많다. 지난 2006년 한해 동안 브라질 정부에 신청된 채광 신청은 무려 3만8천 건이었다. 브라질 정부는 원주민들의 법률안 요구를 보류했다.

남아메리카의 정부들이 경제 활동에 기지개를 켜는 것도 원주민들을 위협하고 있다. 파나마는 모자란 전력 수급을 위해 코스타리카와의 국경에 있는 본익크강에 2004년 댐 건설을 시작했다. 이때문에 이곳에 살고 있는 나소족의 원주민 공동체가 붕괴되고 있다. 댐 건설을 반대하는 나소족의 대다수 구성원을 무시하고 나소족의 족장은 개발 사업의 이권을 노리고 댐 건설을 허가했다. 파나마 정부와 건설업체는 나소족 사이에 생긴 분열을 이용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댐 건설을 위해 도로 공사가 시작되면서 나소족 사이의 대립은 더욱 격해졌다. 댐 반대파의 항의 집회를 막아선 사람들은 같은 나소족의 댐 추진파였기 때문이다. 댐 추진파들은 건설업체에서 건네준 무기를 들고 있었다.

댐 건설 싸고 원주민 이간질시켜 서로 대립하게 만들기도


이런 과정에서 토지를 잃은 원주민들이 도시에서 빈민화되고 있다. 멕시코시티에 사는 2천만명 중 멕시코 원주민(믹스떼까·사포떼까 등)의 수는 약 100만명에 이른다. 그중 약 35만명은 스페인어가 아니라 자기 부족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이들의 대다수는 빈민층이다. 멕시코 국가 인구위원회의 2005년도 자료에 따르면 멕시코 원주민의 75%는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고 문맹률은 전국 평균의 세배인 70%에 이른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저임금으로 일하고 자연스럽게 빈민층으로 굳어지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게다가 원주민 아이의 73%는 연령에 비해 체격이 작고, 5세 이하의 원주민 유아 중 60%는 영양 실조 상태다. 원주민의 평균 수명도 멕시코 전체 평균보다 3년이 짧다. 이처럼 다음 세대의 미래도 어둡다.

지난 2005년 미국 인권 재판소는 파라과이 정부에 의해 토지의 소유권을 빼앗긴 원주민들에게 “정부는 3년 이내에 원주민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실시해라”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파라과이 정부는 “배상하겠다”라고 선언했지만 때가 되자 예산 부족을 이유로 난색을 표시했다. 파라과이에 존재하는 1백82개의 원주민 공동체 중 85곳은 토지가 몰수당해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다. 파라과이 정부는 몰수한 토지를 이미 다국적 기업에게 넘겼다.

지난 1992년에 유엔환경계획(UNEP)의 후원으로 채택된 ‘생물다양성 협약’의 8조에는 원주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생물의 다양성 보전 및 지속 가능한 이용을 위해 전통적인 생활 양식을 가지는 원주민의 지역 사회와 그 지식 및 관행을 보존해 유지해야 한다.”

문제는 생물다양성 협약이든 지난해 유엔에서 채택된 ‘원주민의 권리를 위한 선언’이든 원주민을 보호하려는 국제 사회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각국 정부의 실천은 뒤따르지 않는 데 있다. 유엔 원주민인권담당 특별보고관인 로돌프 슈타벤하겐은 “비준이 필요하지 않아 구속력을 가지지 않는 선언이라고 해도 인권은 그 외의 모든 이익에 우선한다. 따라서 모든 유엔 가맹국은 인권에 관한 국제법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이미 그런 점에서 원주민에 관한 선언들은 국제법 문서와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선언을 국내법의 효력과 똑같이 인정한 나라는 원주민 출신의 대통령을 가진 볼리비아뿐이다. 미국·캐나다·호주 등은 국내법과 충돌이 일어난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투자와 개발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제1 세계와 제3 세계가 변하려면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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