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스타 ‘모시기’ 상아탑 쟁투
  • 허재원 (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08.08.05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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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영입 전쟁’ 최후 승자는 고려대…선수들, 과거와 달리 학벌보다 능력 발휘할 대학 선호
ⓒ연합뉴스
▲ 지난 2월 단국대에 입학한 박태환 선수가 입학식에서 활짝 웃고 있다(오른쪽). 왼쪽은 최근 고려대에 입학 지원을 하겠다고 밝힌 ‘피겨 요정’ 김연아 선수. ⓒ연합뉴스


























지난 7월22일 흥미로운 보도자료 하나가 언론사에 발송되었다. 김연아(18·군포 수리고)의 매니지먼트사인 IB스포츠가 발송한 보도자료에는 “김연아가 고려대에 입학 지원서를 쓰기로 결정했다”라는 내용이었다. 세계 피겨스케이팅의 새로운 신데렐라로 떠오른 김연아가 고려대를 ‘간택’한 사건은 기사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 주인공이 다름 아닌 ‘국민 여동생’ 김연아이기 때문이다.

김연아가 ‘입학 원서를 쓰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곧 고려대 입학이 결정되었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고려대가 김연아의 입학 원서를 손에 쥐고 합격 여부를 고심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 발표로 인해 김연아가 세계 주니어 피겨스케이팅의 여왕 자리에 오르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순간부터 시작된 ‘김연아 영입 전쟁’의 최후 승자는 고려대로 귀결되었다. IB스포츠측은 김연아의 고려대 결정 배경에 대해 “김연아가 평소 가고 싶었던 대학이 고려대이고, 또 고려대가 앞으로 선수 생활에 있을 많은 어려움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대학이라고 여겨 입학 지원을 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고려대는 막대한 후원금을 발판 삼아 야구·축구·농구 등 주요 종목의 유망한 선수들을 끌어들인 ‘대학 스포츠계의 큰손’이다. 최근 농구부 스카우트 비용을 둘러싼 비리 혐의가 불거지며 코칭스태프가 교체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김연아가 고려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충분한 명분은 있다. 고려대가 국내 대학 중 유일하게 최신 시설의 아이스링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세계적인 피겨 스타를 영입하기 위한 필요 조건을 충족한다. 고려대는 김연아측에 언제든지 아이스링크를 훈련 장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대의 한 관계자도 “김연아측에서 먼저 연락이 와 우리도 깜짝 놀랐다”라며 진학 결정은 김연아 선수의 자발적인 선택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빙상계의 한 관계자는 “1년 내내 캐나다에서 머무르면서 외국 코칭스태프와 연습을 하는 김연아가 아이스링크 하나 때문에 진로를 결정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말한다.

오히려 고려대가 대회 상금과 CF 출연료 등으로 매년 수억 원의 수입을 올리는 김연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돈과 아이스링크보다는 학사 일정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대 체육부의 한 관계자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까지는 김연아의 수업 출석 여부와 상관없이 학점을 인정해줄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김연아는 사실상 국내에서 학교를 다니는 것이 불가능하다. 1년 내내 이어지는 연습과 대회 참가가 대부분 외국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학사 일정에 파격적인 특혜, 세계 대회 참가 등 ‘배려’에 끌린 듯

반면 국내 대학들의 경우, 최근 체육부 학생들의 학사 운영이 엄격해지면서 예외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학사 일정에 파격적인 ‘특혜’를 주겠다는 고려대의 당근 전략은 김연아가 진로를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연아 역시 그동안 대학 진학과 관련해서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참가하려면 1년여 동안 대학 생활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이해해주는 대학이면 좋겠다”라며 선수 생활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대학 선택의 최우선 조건으로 여러 차례 밝혀왔다.

고려대는 김연아 영입에 성공함으로써 1년여 전 ‘마린보이’ 박태환 영입에 실패한 것을 만회한 셈이다. 박태환이 경기고 3학년생이었던 지난해, 국내 스포츠계에 유례가 없는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졌다. 박태환은 고려대·연세대·한국체대 등 국내 유수의 명문대로부터 파격적인 조건으로 끈질긴 스카우트 공세를 받았다. 그러나 박태환의 최종 선택은 단국대였다. 박태환의 단국대행은 국내 스포츠계에 신선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박태환은 지난해 8월31일 단국대 수시 2학기 특별전형에 ‘특이 분야 특기자’ 자격(세계선수권 3위 이내)으로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 사범대 체육교육과에 입학 지원서를 냈고, 이후 면접을 거쳐 10월 합격 통보를 받았다. 전형상 수능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되기에 같은 해 11월 수능 시험을 치르지 않고 월드컵 대회에 나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박태환은 고교 시절 연세대와 고려대 등 양대 사립대 이외에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수차례 밝힌 적이 있다. 같은 기간 연세대와 고려대가 학교 차원에서 박태환 스카우트를 위한 전방위적 노력을 기울였다는 소문도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스카우트 금액만 6억원에 달한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박태환이 지명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단국대를 택한 것은 그만큼 단국대가 거절하기 힘든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는 증거다. 한 대학의 체육과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단국대가 박태환 은퇴 후에 대학원 과정과 유학, 그리고 교수 자리까지 보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미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가 된 박태환에게는 장기적인 포석이 중요했다. IOC위원이 되어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던 박태환으로서는 국제 무대에서 연·고대와 단국대의 차이쯤은 미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장래가 보장되면서 학사 일정에 최대한 협조를 받을 수 있는 단국대를 선택한 것이다.

박태환 ‘단국대행’, 명문대 전략 수정 이끌어

유망한 스포츠 스타들을 대학의 상아탑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이제 예전처럼 쉽지 않다. “공부로는 죽어도 안 되니 운동을 해서라도 고려대의 빨강색 유니폼, 연세대의 파란 유니폼을 입어보자”라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가 되었던 시대는 이미 끝난 것이다. 야구·축구·농구 등 주요 종목들이 프로화되면서 고교 대어급 선수들은 대학교 졸업장보다 프로팀의 막대한 계약금을 택하고 있다.

프로야구의 간판 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류현진(21·한화), 김광현(20·SK), 윤석민(22·KIA) 등은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행을 택했다. 베이징올림픽 축구대표팀의 주축 공격수인 이근호(23·대구FC)를 비롯해 김두현(26·잉글랜드 웨스트브롬위치), 조재진(27·전북 현대) 등이 모두 대학 졸업장을 거부한 선수들이다. 한국 축구의 차세대 대표 주자인 이청용(20·FC서울)과 신영록(21·수원 삼성)은 아예 중학교를 중퇴하고 축구에 일생을 걸었다.

대학행을 택하는 고등학교 유망주들 역시 이제는 이름값으로 대학을 선택하지 않는다. 프로 무대에서 뛰고 있는 모든 선수들이 대학을 거친 농구의 경우에도 연세-고려 양대 사학이 대학 무대를 주름잡던 시대는 이미 1990년대 후반에 마감되었다. 프로 리그가 출범한 후 드래프트에서 선발되기 위해서는 유명 대학 출신이라는 점보다 대학 경기에서 많은 시간을 활약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천 송도고 출신의 김승현(30·대구 오리온스)이 동국대를 졸업한 후 프로농구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활약하고 있고, 김주성(30·원주 동부)과 오세근(21·중앙대) 등 당대에 손꼽혔던 초고교급 센터들이 모두 중앙대를 선택했다.

이러한 추세는 다른 종목으로도 점차 확대되고 있어, 주요 유망주들의 서울대 입학이 일반적이었던 수영의 경우도 박태환의 단국대행을 계기로 양상이 변화하고 있다. 학벌보다는 능력을 위주로 하는 사회. 이러한 이상적인 변화는 스포츠계에서 먼저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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