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한국인
  • 도쿄.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8.08.12 11:5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세대들의 ‘또 다른 해방’
▲ 도쿄 동신주쿠 거리. 왼쪽은 정대세 선수. ⓒ시사저널 감명국


한때 ‘한류(韓流)’가 일본을 뒤덮은 적이 있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류의 여파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최근 그 역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으로부터의 새로운 흐름이 한반도를 물결치게 하고 있다. ‘일류(日流)’는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재일한류(在日韓流)’라고 해야 옳을까. 한류의 선봉장이 배용준·보아 등 연예인이었다면 재일한류의 선봉장은 정대세·추성훈으로 대표되는 스포츠맨들이다. 엄밀히 말해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다. 북한 국적과 일본 국적을 가진 이들로 한국 선수의 경쟁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한국민으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재일한국인’인 까닭이다. 재일동포 3세들로 대표되는 재일한국인은 그렇게 일본 땅에서 자신의 야망을 성취해 나간다. 그들의 가슴에 달린 국기가 ‘태극기’이든 ‘인공기’이든, 심지어는 ‘일장기’라도 그들의 성취욕 앞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일본은, 아니 ‘일본 속의 한국’은 지금 엄청난 변화의 물결로 요동치고 있다. 광복 63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과연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2008년 8월 현재를 살아가는 재일동포 3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기자는 지난 8월5일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 언론에서 활동 중인 한 지인의 소개로 기자는 ‘동(東)신주쿠’ 거리의 한 좁은 골목길 안에 위치한 허름한 2층 카페를 찾았다. 현지 언론·출판계에 종사하는 재일동포 3세들이 자주 찾는다고 했다. 네 평 남짓 될까 말까 한 초미니 카페였다. 일본말이 서투른 기자의 최대 고민은 언어 장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카페에서 두 명의 조총련계 교포 3세들을 만나는 순간 해결되었다. 1970~1980년대 초·중·고교에서의 반공 교육을 철저히 이수한 기자에게 ‘조총련’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막연한 긴장감을 조성했지만 그조차도 한낱 기우로 날려버렸음은 물론이다. 아니, 낯선 일본 땅에서 첫날부터 두 사람을 만난 것은 어쩌면 상당한 행운이었다.

정향미씨(가명·여·33)는 초·중·고교 과정인 민족학교와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총련계 신문인 <조선신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당연히 국적도 북한이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4월 한국으로 국적을 바꿨다. 그 이유는 “프랑스 등으로 해외 출장이나 여행을 갈 일이 많은데, 아무래도 북한 여권으로는 제약이 많이 따르기 때문에 편의상 한국으로 국적을 바꿨다”라는 것이었다.

민단계 3세 대다수는 조총련계와 달리 한국말 서툴러

그녀는 현재 <시사저널>을 비롯한 세계 각국 주요 언론의 기사를 종합적으로 담는 일본의 한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같은 민족학교 출신이고 <조선신보> 기자를 거쳐 현재 프리랜서 기자로 활약하고 있는 김현씨(37) 역시 마찬가지다. 그도 2년 전 국적을 북한에서 한국으로 바꿨다. 그 이유는 조금 다르다. 일본에 유학 온 한국 여성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그는 그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최근 한국을 몇 차례 방문했다. 물론 그전에는 북한도 자주 다녀왔다. 김씨는 “우리가 교포 3세임에도 이렇게 한국말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은 순전히 민족학교에 다닌 덕택이다”라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대략 현재 조총련의 70~80%는 조선(북한)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고 있는 추세다”라고 설명했다.

▲ 김일성을 찬양하는 글귀가 보이는 조선대학교 건물. ⓒ시사저널 감명국

“그렇다면 당신들은 조총련계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들 아닌가”라는 질문에, 김씨는 “누구도 우리더러 배신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라며 웃었다. 정씨는 “나는 부모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민족학교를 선택했고 처음 조선 국적을 가졌지만 내가 결혼을 해서 자녀들에게도 그것을 똑같이 권유할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할 문제다”라고 말했다. 김씨 역시 “자식이 태어난다 해도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어떤 쪽으로 유도할지는좀더 고민해 봐야겠다”라고 말했다.

▲ 조총련계 3세 김현씨는 기자에게 자신이 끼고 있는 반지를 보여주었다. 반지에는 한반도 지도가 선명하다. 그는 이 반지를 평양에서 구입했다고 했다.

기자가 이들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새로운 사람이 카페에 들어섰다.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활약하는 재일동포 3세라고 했다. 김씨 등은 반갑게 서로 악수하며 그를 기자에게도 소개시켜주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 머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고 말았다. 테이블 위로 오가는 대화가 일본말 대신 한국말로 이루어진 때문이었다. 그 사진기자는 한국말을 거의 할 줄 몰랐다. 어색하게 자리를 지키다가 슬그머니 자기 몫의 계산을 하고 자리를 떠난 것이다. 김씨는 “저 모습이 단적인 예다. 한국말을 잃어버린 교포 3세들은 이런 자리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획일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기자가 접촉한 재일동포 3세들 가운데 민단계 3세들은 거의 한국말을 하지 못했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한 한국 언론인이 “조총련계와 민단계 3세의 가장 뚜렷한 구분은 한국말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에 있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김씨 등 조총련계 3세들이 민단계 3세들에 대해서 특별한 반감을 갖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안타깝다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민단계 대 조총련계’의 갈등은 어떻게 보면 외부에서 그냥 편하게 생각할 수 있는 단순한 구도일 수 있다. 하지만 김씨가 전하는 교포 사회의 내부 갈등은 이념보다 오히려 세대 간의 문제에 쏠려 있다. 그는 “재일동포 1세대는 그래도 우리에게는 존경의 대상이다. 그들은 어려운 시대에 일본에 정착하고 뿌리내리느라 고생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부모 세대인 2세들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쉬움이 많다. 그들은 이념적 대립이라는 네거티브한 측면으로 치우치며 서로 갈등하고 대립했다”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8월7일 동(東)신주쿠 거리의 한 한인식당에서 만난 임 아무개씨(44)는 같은 조총련계 3세이면서도 또 다른 입장에 서 있다. 그는 여전히 북한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주변에서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는 현상에 대해 그는 “이해는 한다. 하지만 솔직히 기분은 좋지 않다”라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나는 별로 (북한 국적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정 불편해서 북한 국적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나는 일본 국적으로 옮겼으면 옮겼지, 한국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아들 세대인 4세에 대한 입장에서는 그 역시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지금 큰애가 민족학교 중급(중학) 3학년인데, 그 애가 만약 자기 필요에 의해서 일본으로 또는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겠다고 하면 몹시 서운할 것이다.

그래도 절대 안 된다고 무작정 반대하지는 못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정대세 선수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남태화(주)Evolution 대표는 현재 재일한국인의 위치를 가장 극명하게 대변하는 듯하다. 그 또한 임씨와 마찬가지로 현재 북한 국적을 갖고 있는 조총련계 3세다. 그런데 그는 사업상 어쩔 수 없이 한국도 수시로 드나들고,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과도 자주 접촉을 하고 있다. 그는 외국을 드나들 때 항상 세 개의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 국적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정식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지만 특수영주권자로서 ‘재입국허가증’을 준다. 일본 여권에 준하는 것이다. 북한에 들어갈 때에는 북한에서 발급한 정식 여권을 갖고 간다. 한국에 들어갈 때는 한국에서 발급하는 ‘임시 여권’을 받아 간다”라며 웃었다.

▲ 조선대학교 내 합주부 동아리 학생들과 기자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민해 정착한 ‘뉴커머’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라

의외로 기자가 도쿄에서 취재에 상당히 곤란을 겪은 것은 민단계 3세들과의 접촉이었다. 그들은 만나기도 힘들었고, 어쩌다 어렵사리 소개를 통해 만난 3세들은 하나같이 한국말로 대화가 불가능했다. 현지 지인의 도움으로 8월6일 만난 민단계 3세 이 아무개씨(30)는 일본 국적을 갖고 있었다. 일본 학교를 나와서 현재 일본에서 식당업을 하고 있었다. “한국말을 사용하지 못하는 데서 불편함을 못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그는“전혀 문제 없다”라고 밝혔다. 여자친구도 일본인이라는 그는 “일본 친구들이 굳이 묻기 전에 내가 먼저 교포 3세라고 말하지 않는다. 정대세나추성훈 선수 등에도 별 관심이 없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기자가 현지에서 느낀 또 하나의 뚜렷한 현상은 민단과 조총련계의 쇠락과 함께 새로운 세력으로 ‘뉴커머’가 뜨고 있다는 사실이다. 뉴커머란 재일동포를 지칭하는 ‘올드커머’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최근 일본으로 건너와서 정착한 이민 1세대를 말한다. 1985년 일본으로 유학차 건너와서 현재 이곳에 정착한 조옥제씨(51)는 뉴커머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에는 알다시피 민단이라는 조직이 있다. 반대 성향의 조총련 조직도 있다. 그들은 ‘특별 영주자’라고 하는 특수 신분을 갖고 있다. 우리 같은 이민 세대들은 일반 영주자라고 해서 그들과 구분된다.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은 있지만, 정서가 좀 다르다. 솔직히 올드커머들은 우리를 보는 시각이 그렇게 따뜻하지 못했다. 우리를, 언젠가는 다시 나갈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재일한국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배타적이기까지 한 민단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조총련으로 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했다.”

조씨와 뜻을 같이하는 뉴커머들은 자신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8년 전 ‘재일본한국인연합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었다. 민단과 조총련으로 대표되는 재일 한국인 단체에 한인회가 새롭게 추가된 셈이다. 한인회에 참가하고 있는 40대 후반의 한 관계자는 “지금의 교포 3세들은 20~40대로 우리 같은 뉴커머들과 비슷한 세대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너무나 다르다. 국적 문제를 떠나서라도 그들은 이미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일본화되었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조총련계 3세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는 민족적인 자존심을 지키려는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 일본에 건너온 이후 조총련계 3세들을 더 많이 만났다. 하지만 좀더 깊숙이 들어가면 그들과도 아직 어쩔 수 없는 간극을 느낄 때가 있다. 간혹 열에 한둘씩 북한의 주체사상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사람도 있다. 솔직히 그런 거부감을 완전히 떨쳐버리기는 힘들다”라고 말했다.

뉴커머들의 숫자는 최근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약 15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불법 체류자까지 합해서 20만명이라는 얘기도 있다. 세력이 커지는 만큼 그들 사이에서도 세대 차와 시각 차가 생기고 있다. 8월6일 밤 신주쿠 거리의 한 주점에서 만난 뉴커머 김진씨(31)는 스스로를 ‘뉴커머의 막내 격’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에서 일문학을 전공하고 유학 왔다가 일본에 주저앉은 지 5년째인 그는 현재 신주쿠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다. 김씨는 “민단이 우리에게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인회 역시 대안 세력으로 자리 잡기는 아직 한참 멀었다. 그나마 그들은 일본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선배 세대들이다. 솔직히 신세대 뉴커머들은 일본에서 정착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들어서 다른 쪽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라고 말했다. 확실히 신세대 뉴커머들의 사고는 자유분방했다. 김씨는 “조총련에 대한 선입견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곳에 와서 사귄 올드커머의 80%는 모두 조총련계 3세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말이 통하고, 순수하고 계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재일한국인 사회에서 변화의 물결은 빨라지고 있었다. 민단과 조총련이 서서히 냉전 시대의 산물로 쇠락하고 그 새로운 중심축을 뉴커머들이 차지하고 있는 성향은 뚜렷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물결에 재일동포 3세들도 적극 동참하고 있었다. 김현씨는 재일동포 3세로서 현지에서 겪는 고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런 말이 있다. ‘조총련은 돈이 없어서 망하고, 민단은 후계자가 없어서 망할 것이다’라는. 민단 쪽은 이미 민족성을 많이 상실했다. 20~30년 후면 아마 조총련계도 다 ‘배신자’가 될 것이다.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어쩔 수 없다고 본다. 사실상 재일교포 자체가 없어진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 공백을 자연스럽게 뉴커머들이 채울 것이다. 나를 포함한 올드커머 3세들은 뉴커머들과 어울리면서 이 땅에서 한국인임을 느끼고 있다. 여기 있는 냉커피는 시간이 지날수록 얼음이 녹아서 점차 커피 제 색깔을 잃어가고 있지만, 커피가 리필이 되면 다시 커피 색깔을 어느 정도 되찾곤 한다. 뉴커머들이 그런 리필 커피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미 그런 현상은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라고 밝혔다.

  

 민족의 이름으로 하나 된 ‘탈국적 캠퍼스’

도쿄 취재를 나설 때 기자가 반드시 방문하리라 마음먹은 곳이 있다. 조선대학교였다.
재일동포 3세들의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간단치는 않았다. “남조선 발행 매체인 <시사저널>이 어떤 취재 목적으로 조선대를 방문하려 하는가”라는 의구심으로 취재 협조에 난색을 표하는 조총련 중앙본부 사무실 관계자를 끈질기게 설득해야 했다. 현지 지인의 도움을 받은 끝에 기자는 8월7일 오후 도쿄 외곽에 위치한 조선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방학이어서 한산한 가운데, 다행히 강당에서 합주부 동아리 활동 연습 중인 무리의 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3~4학년으로 이루어진 8명은 21~23세의 재일동포 3세들이었다. 그 작은 무리 속에서도 구성 요소는 다양했다. 3명은 한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한 명의 여학생은 “내 아버지는 현재 민단의 간부이십니다”라고 웃으며 밝혔다. 민단계이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조선대에 입학했다는 것이다.

북한 국적의 조총련계 3세, 한국 국적의 조총련계 3세, 그리고 한국 국적의 민단계 3세로 조합된 8명은 서로 까르르 웃고 떠들며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조선대학교의 한 관계자는 “여기 있는 재학생의 30% 이상이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3세들이다”라고 밝혔다.

학교 본관 위에 붉은 간판의 흰 글씨로 선명하게 서 있는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 만세’라는 글귀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기자가 “(민족학교가) 여전히 북한의 주체사상에 치우쳐 있는 듯한 저런 모습은 지금의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것 아닌가. 재일동포 3~4세들을 폭넓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고칠 용의는 없는가”라고 질문했다. 이 관계자는 “학교의 운영만 생각한다면 그것도 한 방법이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 학교 개교 이념을 생각한다면, 순간의 대세가 그렇다고 해서 기존 가치까지 다 잃을 수는 없는 것이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시사저널 감명국
민단이라는 조직이 있는데도 한인회를 따로 조직한 셈인데, 서로 껄끄러울 것 같다.
솔직히 그런 측면이 있다. 민단 1세대들의 시대적 희생과 고초를 우리는 존중한다. 문제는 그 다음 세대에서 잘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민단계 3세들을 보라. 그들에게 한국적인 것이 무엇 하나 남아 있는가. 민단은 어떻든 간에 현재 한국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 준공무원적 성격을 지닌 단체다. 재일한국인들을 위해서 좀더 희생하고 봉사하려는 정신이 필요한데, 그런 역할을 못하고 있다. 민단은 개혁되어야 한다.

뉴커머들이 일본에서 느끼는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교육 문제다. 나도 이민 2세대를 키우는 1세대 아버지의 입장이다. 과연 우리 자식들이 이 일본에서 어떤 교육을 받을 것인지가 최대의 고민이다. 그들에게 앞으로 무조건 한국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한국 국적만을 강요할 수도 없다. 하지만 설사 필요에 의해서 일본 국적을 갖더라도 한국계 일본인임을 당당히 밝히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민족학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한국어 교육을 시켜온 조총련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북한 쪽이다 보니 주체사상 같은 교육이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그나마 민단계의 후세 교육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고 잔재조차 없다. 그것은 민단 스스로도 인정하는 그들의 실책이다.

뉴커머가 중심이 된 한인회가 민단과 조총련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당장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다. 그런 목적으로 이 단체를 만든 것도 아니다. 일본 내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긍심을 잃지 않아야겠다는 것. 그리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융합과 조화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우리는 전체 한인들을 다 아우르고자 한다. 한국 국적이 없더라도 한국계이면 설사 북한 국적이라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그래서 조총련계 3세들도, 또 민단계 3세들도 정기적으로 만난다.

한인회의 존재감이 아직은 미미한 듯하다.
인정한다. 현재 정회원은 약 4천명 정도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15만명 정도라고 한다. 불법 체류자까지 포함하면 20만명에 육박한다는 얘기도 있다. 그 숫자에 비해 아직 한인회의 정회원 숫자는 미미하다. 솔직히 일본에 건너와서 생활하는 사람 대부분이 공부를 하다가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제 역사가 8년에 불과하니 미국의 한인회와 비교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민단도 하지 못하고 조총련도 하지 못하는 ‘일본 속 한국’의 역할을, 앞으로 한인회가 맡아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재일교포 3세들도 이에 공감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