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곡의 역사’가 상상력 만났을 때
  • 이재언 (미술평론가) ()
  • 승인 2008.08.1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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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처음 전시되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프리다 칼로 등 작품 한자리에
▲ 디에고 리베라 작 (왼쪽). 펠리시아노 카르바요 작 (오른쪽).

으레 방학 때면 대형 전시들이 모든 매체들을 동원해 호객에 나서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전시의 흥행은 곧 대중들에게 얼마나 익숙한 타이틀을 내세우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한 전시들에 식상해할 무렵, 약간은 낯설면서도 콘텐츠나 구성이 꽤 괜찮은 전시를 하나 만날 수 있었다.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7월26일~11월9일,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이 그것이다.

라틴아메리카는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우리에게 낯선 곳이다. 솔직히 말해 중남미에 수없이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어느 나라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 암기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라틴아메리카의 지리, 역사, 문화 모든 것이 그렇게 친숙하지는 않은 실정이다. 중남미의 미술 역시 직접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정치·경제적으로 교류가 미미했던 것과 함께, 서구 미술의 수용에 급급한 우리의 문화 현실이 중남미에까지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던 탓이다. 게다가 대다수 중남미 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정정 불안과 사회적 혼란상이 막연한 편견을 갖게 했거나 무관심을 가중시켜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미술이 우리에게 전혀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1980년대 들불처럼 번졌던 비판적 현실주의 미술운동의 모델이 바로 멕시코 벽화운동이었다. 무수한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도입하는 데 있어, 러시아나 중국의 것은 근대사의 불편한 기억 때문에 의도적으로 거리감을 두었던 편이다. 하지만 제국주의 식민 지배 역사나 계층 간의 갈등 문제들이 우리와 비교적 유사한 중남미에서의 문화운동은 오히려 친근하게 접근되어 진보적 작가들에게 연구 붐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다.

멕시코,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공화국, 과테말라, 칠레, 아르헨티나,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브라질, 우루과이, 페루, 에콰도르, 파라과이, 쿠바, 온두라스 등 16개국 출신의 대표 작가 84명의 작품 1백21점이 한자리에 모여 이루어진 이 전시는 가히 매머드 급이다.

중남미의 역사와 사회적 모순 그려내

라틴아메리카 각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망라된 국내 최초의 전시다. 이 전시는 단순히 양식적인 차원에서의 이해만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가 안고 있는 과거의 역사와 사회적 모순 등의 내용들에 대해 상당히 소상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라틴아메리카에 속한 국가들은 상당한 공통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인종 구성이나 식민지 역사, 지배 구조, 이데올로기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분류되고 있다. 따라서 국가별 특징보다는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겪고 있는 현대사를 어떻게 작품 속에 담아내고 있으며,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전시는 네 가지 주제의 섹션으로 구분되어 꾸며져 있다. <세계의 변혁을 꿈꾸다> <우리는 누구인가> <나를 찾아서> <형상의 재현에 반대하다> 등이다. 가장 먼저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미술의 서장을 연 사건은 1920년대에 멕시코에서 일어난 벽화운동이다. 중남미 미술이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강력한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해 라틴 예술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것이 바로 벽화운동이다. 인디오 및 메스티소의 권익을 위해 백인 지배에 항거한 멕시코 혁명의 영향으로 시작된 벽화운동은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시케이로스, 호세 오로스코와 같은 걸출한 화가들을 배출한 대전환점이었다.

이 가운데 디에고 리베라는 중남미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또한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었던 사실로도 유명하다. 아카데믹한 화풍으로 시작해 사회 비판적인 벽화 작업으로 이어진 그의 작업은 멕시코 전역은 물론 옛 소련 및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시케이로스의 경우는 사실주의적 방법의 한계를 자각하면서 아방가르드의 실험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비교적 현실에 집중해 정치적 테제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오르스코와 이들의 그림들은 보통 라틴 음악에서 보여준 정열과 낙천성으로 대표되는 밝은 색조와는 상이한 메시지 중심의 화풍으로 정착된 것이 주목할 만하다.

▲ 엑토르 폴레오 작 (맨 위). 프리다 칼로 작 (위)

특유의 기질이 초현실주의로 형상화되기도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정체성은 다른 대륙과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띠고 있다. 마야나 잉카에서 볼 수 있듯이 인디오들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 백인들의 침략과 식민 지배, 다양한 혼혈 인종과 구성이라는 혼란과 갈등의 현실에 직면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유난히 자주 한다. 그리하여 토착 원주민들의 전통과 고유의 화사한 색감과 나이브한 조형적 전통 등을 투영시키는 화풍이 자연스럽게 모색된다. 전자의 거장들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남미 현대미술의 정체성 모색에서 널리 지지받는 중요한 양식으로 정착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멕시코의 루피노 타마요, 베네수엘라의 페데리코 브란트, 후안 파비아니, 브라질의 카발칸티 등의 작업이 바로 좋은 예다.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작업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양식이 있다면 뛰어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내면의 성찰과 재구성을 강조한 화풍이다. 굳이 기존의 미술 사조에 대입하자면 초현실주의에 근접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사조나 양식으로서의 초현실주의 미학을 추구한 결과로 나타났다기보다는 라틴 민족 특유의 기질과 상상력이 뛰어난 미의식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화풍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프리다 칼로, 페르디난도 보테로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물론 미술 사조 내에서의 초현실주의 자체가 전혀 배제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양식으로서의 초현실주의의 여러 미학과 방법들을 자신들의 전통과 미의식에 변용시켜내는 작가들 역시 적지 않다. 칠레의 로베르토 에차우렌, 아르헨티나의 로베르토 아이젠베르그, 베네수엘라의 엑토르 폴레오 등이 그 예다.

이번 전시에서 중남미 미술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멕시코와 베네수엘라다. 물론 두 나라가 이 전시에 가장 적극성을 띤 이유도 있겠지만, 걸출한 작가가 많이 배출된 사실 역시 중요한 원인이다. 하나의 전시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일이 성급한 것일 수 있지만, 작가들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의 코너다. 영화 <프리다 칼로>를 통해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덕에 그들의 그림들을 더욱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 같다. 특히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모두 7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가장 많은 관람자들이 운집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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