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복원’의 꿈, 무엇으로 막을까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09.0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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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ᆞ유럽, 그루지야 침공으로 옛 소련 전성기 재현하려는 러시아 앞에서 ‘끙끙’
▲ 8월11일 러시아 침공 직전의 그루지야 고리시에서 그루지야 탱크가 스탈린 동상 앞을 지나고 있다. ⓒAP연합

그루지야 동부의 고도 고리에는 스탈린의 동상이 서 있다. 최근 전쟁으로 거의 모든 시가가 폐허가 된 황량한 도심에 그의 동상만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마치 초능력자처럼 신비한 광채까지 내면서 도시를 응시한다. 스탈린은 그루지야 태생이다. 지난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새 교과서에서 스탈린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러시아 지도자로 칭송했다. 70년의 소련 역사에서 스탈린만큼 러시아 영토를 넓히고 강대국으로 팽창시킨 인물은 없다. 하버드 대학의 리처드 파이프스 교수에 의하면 소련은 17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매년 지금의 네덜란드 크기의 영토를 확장했다. 푸틴은 한때 그루지야의 미하일 샤카슈빌리 대통령에게 스탈린 같은 영웅을 낳아줘서 고맙다고 할 만큼 20세기 최악의 독재자를 찬양했다. 스탈린은 죽었으나 그의 이미지는 푸틴의 몸으로 부활한 셈이다. 마치 스탈린의 영혼에 이끌린 듯 푸틴의 명령을 받은 러시아 탱크들은 남(南) 오세티야의 러시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그루지야를 침공했다.

그루지야를 침공한 러시아를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러시아의 욕망은 나타난 것보다 원대하고 복잡하다. 그루지야 사태만 하더라도 친미 반모스크바 노선을 걷는 샤카슈빌리 정권을 전복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러시아는 그루지야를 비롯한 옛 소련 위성 국가들을 위협해 사라진 제국을 복원할 속셈이다. 러시아가 옛 위성 국가들을 ‘가까운 외국(near abroad)’으로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선, 러시아 견제는 그루지야 침공에 대한 보복 차원이 아니라 미래의 침략을 방지하는 전략에 기초해야 하고, 또한 전쟁을 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향후 서방의 대러시아 전략을 크게 세 가지로 압축했다. 첫째 러시아의 침략 저지, 둘째 러시아 이웃에 있는 옛 위성 국가들의 억지력 증대, 셋째 그루지야의 원상 회복이다.

보복 시도하기보다는 분명한 원칙 아래 협상 유도해야

1983년 소련이 KAL 007편을 격추했을 때 미국인 10여 명이 죽었다. 그때 소련과의 외교·경제 관계를 단절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감정보다는 이성이 승리한 덕분에 그런 사태는 없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 항공사 아에로플로트의 미국 취항을 금지했을 뿐 양국의 기본 관계는 유지했다. 이런 신중한 대응은 뒤에 레이건의 2기 임기 중에 핵무기 감축 조약을 체결하는 결실을 낳았다. 인내가 가져온 소중한결과다.

마찬가지로 이번 사태에서 보복을 시도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현명하지도 않다. 유럽은 러시아의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국제 사회 역시 핵 확산 방지나 기타 국제적 도전에서 모스크바와 협력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과 유럽은 단호하되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대응하는 것이 정도다. 무엇보다 그루지야로부터 철군하겠다는 약속 이행을 압박하는 것이 급선무다. 다음 단계는 모스크바와의 대화 창구는 열어놓되 그루지야의 힘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저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다른 나라들과 공정한 거래를 하도록 러시아를 유도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보다는 그루지야의 재건과 인프라 구축을 도와 이 나라를 번영시킴으로써 러시아의 경제적 압력에 견뎌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서방은 마침 조 바이든 미국 상원의원의 제의대로 그루지야 재건 비용으로 수십 억 달러를 제공하고, 아울러 인도주의적인 원조도 병행하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또한, 그루지야에 대한 투자도 촉진해야 한다.

러시아의 소치에서 열릴 2012년 동계 올림픽 개최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서방을 분열시켜 실패할 공산이 크다. 그러나 러시아가 내년 여름까지 그루지야에서 완전히 철수하지 않거나 다시 인접 국가들을 위협하는 행동을 한다면 선진 민주화 그룹인 G-8에서 러시아를 제명해야 한다.

러시아의 대담한 도발·위협과 관련해 그루지야가 범한 실책을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은 모스크바의 국수주의자들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 나토 외무장관들이 공약했듯이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다시 공약하는 것은 절대로 필요하다. 나토의 신규 가입을 러시아 마음대로 방해할 수 없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독립과 주권 및 영토를 지키려는 옛 위성 국가들에게 강력한 안보 지원을 한다면 해당국들의 자위력은 크게 향상될 것이다. 아울러 공중과 지상 방어력을 강화하고 정찰과 경계 및 항구와 수송 체계를 확보하는 것도 억지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그루지야와 여타 옛 위성 국가들이 나토 회원국은 아니지만 이들 국가의 방어를 위해 미국 및 나토와 긴밀히 협력하면 러시아도 무분별한 도발은 하지 못할 것이다.

중앙아시아 국가들 간 안보 및 경제 협력도 억지력을 높인다. 이들은 그루지야에서 흑해 나 터키로 가는 에너지의 육상 수송로 확보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힘으로 제압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다음 차례가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미국과 유럽은 이 국가들을 잘 다독거려 안보 및 경제 문제에서 긴밀하게 협조하도록 해야 한다. 송유관의 안전도를 높이고 인프라를 현대화 하는 데도 협력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 국가들 간에 다소의 갈등이 있으나 대의를 위해 극복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을 모방한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경제 개혁이나 협력, 투자를 촉진할 것이다.

평화 프로그램을 위해 만든 나토의 연대는 평화시에 대비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군사적 위협에 대처할 수 없다. 평화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해 위기시에 상호 협력이 더 잘 되도록 해야 한다. 쌍무적 안보 유대의 강화, 특히 미국과의 유대 강화는 중앙아시아와 남카프카스의 위험한 안보 공백을 줄이는 데 필수적이다.

▲ 8월19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부장관(왼쪽)과 버나드 쿠쉬너 프랑스 외무부장관(가운데)이 그루지야 사태와 관련한 나토 회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위). ⓒEPA

옛 위성국가의 안보ᆞ경제 문제에 긴밀한 협력과 지원 급해

그루지야는 그들대로 민주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 최근 일련의 비극적 사태에 대한 철저한 조사는 필수적이다. 러시아의 침공을 도발한 측면이 있는지, 있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도 규명해야 한다. 자유로운 언론 취재와 의회의 조사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번 사태는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가까운 외국’을 접수하기 위한 러시아의 팽창 도미노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끝없이 영토를 확장하는 스탈린의 망령이 하필이면 스탈린의 고향 그루지야 침공으로 재현된 것은 역사의 심술일지 모른다. 스탈린이 죽었을 때 그루지야인들은 그를 애도했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하자 폭동까지 일으키면서 그를 옹호했다. 이 역사를 기억하는 그루지야인들은 지금 자기 나라 수도 30Km 까지 진격해온 러시아 탱크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루지야 침공은 러시아 뒤뜰에 친미 정권이 자리 잡을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푸틴의 결의를 나타낸다. 1948년 스탈린이 베를린 봉쇄를 통해 미국의 의지를 시험했듯 푸틴은 그루지야를 통해 서방을 시험했다. 스탈린의 무덤 앞에서 시인 예브게니 예프투센코는 경고했다. 스탈린이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라고. 그러나 이미 늦은 것 같다고 뉴욕타임스는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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