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매는 한국 영화, 빛이 안 보인다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8.11.04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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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수 줄면서 개봉·제작도 지지부진…때 아닌 정치 공방에 마니아들도 ‘눈살’

▲ 네티즌들이 투자자 모집에 나선 영화 의 원작만화 에 등장하는 인물들.

한국 영화계가 울상이다. 전국 각지의 극장들은 관객의 발길이 뜸해져 한산하고, 제작 편수는 줄어들고 있다. 한국 영화 행정을 이끌어가야 할 영화진흥위원회는 심각한 내부 갈등을 빚어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럽다.

한국 영화계가 위기라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의 흥행 부진은 예사롭지 않다. 하반기 최고 기대작이었던 <모던보이>와 <고고 70>은 각각 76만명, 68만명의 관객만을 모으며 흥행에 실패했고, 줄어든 제작 편수를 메우기 위해 완성이 되고도 극장을 잡지 못했던 ‘창고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했지만 이들마저도 줄줄이 좌초했다. 평단이 수작으로 인정한 <사과>마저 관객으로부터는 외면을 받았다. 영진위 발표에 따르면 극장을 찾은 전체 관객 수도 급감해 최고치를 기록한 2006년에 비해 약 3천6백만명이 줄었다.

영진위, 8백억원 규모 펀드 조성 발표

관객 수 감소는 수익성 악화로 이어져 이로 인한 투자 경색, 제작 위축, 수요 감소의 악순환으로 연결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제작 편수의 감소이다. 영진위 통계에 따르면 올해 한국 영화 제작 편수는 약 30여 편에 불과해 2006년에 비해 40% 가까이 줄어들었다. 극장을 메워나가기도 버거운 수준이다. 지난 10월27일 열린 ‘한국 영화산업 활성화 대책 발표’에서 영진위는 8백억원 규모의 신규 펀드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강한섭 위원장은 “적극적인 제작 지원을 통해 최소 50편에서 60편 수준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영진위의 노력이 제작 여건에 숨통을 틔워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지금도 제작 현장에서는 한창 준비 중이던 영화의 제작이 연기되거나 무산되었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이해영 감독의 <29년>,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이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으며 제작이 잠정 중단되었고, 박진표 감독의 <내 사랑 내 곁에>는 주연 배우 권상우의 출연 번복으로 제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 작품 모두 <천하장사 마돈나>의 이해영 감독, <음란서생>의 김대우 감독, <그놈 목소리>의 박진표 감독 등 관객과 평단 모두에 인정을 받고 있는 감독의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영화계의 기대와 관심을 받았다. 촬영에 들어간 영화들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이다. 보통 제작비 예산의 70~80% 정도가 확보되면 제작에 들어가는 데다 촬영 진행 중에 예산을 초과하는 경우도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제작 현실의 어려움에 대해 한 영화사 관계자는 “지금 준비 중인 영화의 주·조연급 연기자, 감독 및 스태프의 캐스팅을 완료한 상황이지만 부족한 투자분을 유치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당초 예산에서 10억원가량을 감축하고 투자사를 찾았지만 이마저도 투자자의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다. 연기자와 감독 등에게 마냥 기다리라고만 할 수 없어 난감한 상황이다. 다른 제작자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투자 유치 실패로 인해 배우를 붙잡아둘 수 없고 배우가 이탈하게 되면 투자 유치의 큰 동력을 상실하게 되어 더욱 난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인기 만화가 강풀의 <26년>을 영화화하는 <29년>의 좌초는 영화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원작 만화의 인지도가 높고 이해영 감독, 김아중·류승범·변희봉 등의 화려한 주·조연급 캐스팅 등 흥행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고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랭크인 1주일 전에 중단되었다는 점도 충격을 더했다.

명감독·명배우에도 맥 못춰

제작 중단 소식이 알려지자 네티즌이 자발적인 소액 투자자 모집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아고라에 마련된 ‘강풀 26년 영화 제작 소액 투자자 모집’에는 2천명이 넘는 네티즌이 기꺼이 10만원의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하겠다며 서명을 했고, ‘<29년>(강풀의 <26년>) 영화화가 예정대로 진행되기를’에는 10월30일 현재 4천4백98명이 영화 제작 재개를 위한 서명에 동참했다.

<29년>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소중한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계엄군으로 참여해 시위대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사람들이 모여 책임자인 당시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실제 인물의 암살 스토리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 영화화 이전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영화계에서는 <29년>의 제작 중단 이유가 일부 투자자들이 정치권의 눈 밖에 나기를 꺼려 투자를 철회했기 때문이라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한 영화의 제작 중단에 포털 사이트에서 서명운동까지 벌어진 것도 이런 소문을 들은 네티즌들이 정치적 이유로 영화가 좌초되는 것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영화계의 한 관계자는 “이것이 사실이라면 큰 문제이다. 영화에 대한 심판은 관객이 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영화 제작이 어려워진다면 창작의 자유와 관객의 볼 권리가 심하게 훼손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29년>의 제작사인 청어람의 한 관계자는 제작 중단에 대해서 거론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며 자세한 설명을 꺼렸다. 그는 “현재 제작 철회가 아니라 잠정 연기한 상황이다. 부족한 투자분을 유치하기 위해 제작사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계에서 때 아닌 정치 공방까지 벌어지고 있다. 지난 5월 취임한 강한섭 영진위장은 공개석상에서 “과거 영화 정책은 하류 진보가 이끌었다”라는 등의 발언으로 ‘색깔’ 논쟁을 일으켰고, 강위원장이 ‘하류 진보’라고 규정한 전임 위원회의 정책들은 새롭게 바뀌었거나 표류 중이며 지난 국정감사에서는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영진위에 대한 강한 비판이 흘러나왔다. 영화계에서는 “지난 정부 시절 이념적 성향이 강한 영화들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는 불이익이 돌아갈 것이다”라는 괴소문이 돌고 있다. 

문화예술의 영역인 영화산업에 정치적인 요소가 들어가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영화를 제작하고 영화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문제들이 영향을 미친다면 그 피해는 결국 관객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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