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자에게 ‘아기’ 있나니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8.11.04 03:3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임, 신체적 결함보다 초조함·스트레스가 더 큰 원인…건강보험에도 적용시켜야

▲ 강서구에 위치한 강서 미즈메드 불임센터. ⓒ시사저널 박은숙

결혼 7년차인 고경훈씨(41·가명) 부부는 아이가 없다. 고씨 부부는 담배와 술을 하지 않고 성인병도 없는 건강한 체질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좋은 공기와 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스트레스를 줄여보라는 지인들의 권유에 따라 지난해에는 서울에서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하기까지 했다. 고씨는 “원인도 없이 아기가 생기지 않으니 조바심이 난다. 이제는 인공수정까지 고려하고 있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임으로 고통받고 있는 부부는 약 1백40만 쌍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불임의 원인은 다양하다. 배란과 자궁 이상 등의 여성 불임과 희소정자증과 무정자증 등의 남성 불임이 있다. 늦어지는 결혼 시기, 늘어나는 재혼과 자연유산, 스트레스 등 외부 요인도 부각되고 있다. 신체가 불임이 잘 되는 체질로 변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여성 불임은 기초 체온, 혈액, 호르몬, 항정자 항체, 자궁경부 점액, 자궁내막, 자궁난관 조영술 등 다양한 검사로 진단한다. 남성 불임은 정액 검사가 일반적이다. 구체적인 진단이 필요할 경우 병력, 정자 생산, 정자 이상, 정관 검사 등 비뇨기과적 진단을 추가한다.

아이 없는 부부 1백40만 쌍

여성 불임의 주원인으로 꼽히는 ‘배란 이상’일 경우 크로미펜과 같은 배란 유도제를 투약해서 배란을 촉진한다. 또, 호르몬을 투여해 자연 임신을 유도한다. 그래도 안 되면 인공수정(AI)과 시험관아기(IVF) 시술을 고려할 수 있다. 정액에서 건강한 정자를 골라 여성의 자궁에 주입하는 인공수정은 정자의 운동성이 떨어지거나 여성에게 정자에 대한 항체가 있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정자가 지나가는 여성의 나팔관이 막혀 있거나 아예 없는 경우, 또는 인공수정에 여러 번 실패한 경우라면 시험관아기 시술을 생각할 수 있다. 체외수정이라고도 하는 이 시술은 정자와 난자를 체외에서 수정시켜 2∼5일간 배양한 포배(blastocyst)를 자궁으로 이식하는 것이다.

남성 불임의 원인인 희소정자증을 해결하기 위해 정자 직접 주입술(ICSI)을 시술한다. 난자에 정자를 직접 주입해서 임신율을 높이는 방법이다. ICSI로 수정된 배아는 배양 과정을 거쳐 자궁에 이식한다.

정자 수가 매우 적거나 없는 경우에는 미세수술적 부고환 정자 흡인술(MESA)이나 고환 내 정자 추출술(TESE)을 한다. 남성의 체내에서 정자를 뽑아 난자에 직접 주입하는 방법이다. 건강한 배아를 자궁에 이식해도 착상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착상이 잘 되지 않는 대표적인 이유가 자궁내막 손상이다.

한지은 강남차병원 불임센터 교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자궁내막이 손상되면 수정된 난자가 착상되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착상시킬 수 없으므로 임신중절수술, 문란한 성생활 등 자궁내막 손상 원인을 피하는 것이 예방법이다”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식습관을 바꿔 불임을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국 하버드 대학 의대 연구팀은 지난 30년간의 연구 결과와 전세계 의학 저널의 임신 관련 정보 등을 바탕으로 이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를 국내에 소개한 정혜원 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아기 시술보다 식습관 개선(fertility diet)이 불임 극복에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흰 쌀밥보다 정제하지 않은 쌀이나 잡곡밥이 좋고, 육류보다 식물성 단백질이 불임 극복에 좋다. 트랜스 지방은 하루 4g만 섭취해도 배란을 억제해 불임률이 2배가량 증가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라며 식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너무 뚱뚱하거나 말라도 임신이 어렵다고 한다. 정교수는 “몸무게(kg)를 키(m)의 제곱으로 나눈 체질량지수(BMI)가 20~24kg/㎡로 정상 체형 여성의 임신 가능성이 가장 크다. 너무 비만하거나 마른 여성은 임신이 어렵다. 복부 지방 세포에서 생긴 호르몬이 여성호르몬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배란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살을 무리하게 빼는 여성이 많은데 체중이 45kg 이하 또는 BMI가 17kg/㎡ 이하인 여성은 배란 자체가 잘 되지 않는다. 살이 찐다고 저지방 우유를 마시는데 사실 저지방 제품은 성호르몬 균형을 깨뜨려 불임을 일으킨다”라고 설명했다.

여성 나이 35세 이하라면 서두를 필요 없어

▲ 정자 채취실에서 채취한 정자를 확인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여러 불임 치료법이 있지만 전문의들은 무엇보다 자연 임신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부부 생활이 1년이 넘으면 불임 치료를 시작하라고 권한다. 특히 여성의 나이가 35세를 넘으면 불임 가능성이 커지므로 6개월 동안 임신이 되지 않을 때에는 불임클리닉을 찾아 상담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여성의 나이가 35세 이하라면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인공중절수술의 경험이 있어 불안하거나 배란 주기가 극히 불규칙해서 도저히 배란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느긋하게 기다려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전문의들은 정자와 난자의 기계적 결합에만 집중하는 ‘시험관아기 만능주의’는 불임 해결의 근본 해결책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조현희 여의도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젊은 부부가 불임클리닉을 찾아와서 뾰족한 해법을 요구한다. 사실 불임에 대한 초조함과 스트레스로 임신이 잘 되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마음을 편하게 먹고 기다릴 것을 권한다. 그럼에도 성급하게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아기 시술을 받으려는 부부도 있다”라며 자연 임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건강한 부부라도 심한 스트레스로 자연 임신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의사들은 이런 경우를 불임(不姙)이 아니라 난임(難姙)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재성 생활건강연구소장(한의사)은 “이런저런 불임 치료를 받다가 결국, 포기하고 마음을 편하게 먹은 후에 임신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불임은 단순히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기계적인 문제가 아니라 기능적인 문제이다. 한의학에서는 기(氣)의 균형을 맞춰 한약으로 불임을 극복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적 고통을 겪는 부부들이 적지 않다.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탈출구를 찾는 여성도 있다. 최영민 대한생식의학회 이사(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불임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님에도 여성이 받는 정신적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불임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공동으로 풀어야 할 숙제이다”라고 지적했다.

보건복지가족부는 현재 불임가정에 시술비로 1백50만원(기초생활보호대상자 2백55만원)씩 최대 2번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를 많이 낳을 것을 장려하면서 불임 부부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는 편이라는 불만도 나온다. 신순철 인구보건복지협회 홍보실장은 “명백한 질환이므로 건강보험의 적용 범위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시험관아기 시술도 건강보험 수혜 대상에 넣어야 한다. 현재 저소득층 불임 부부에게 얼마씩 일괄적으로 지원하고 있는데, 이런 지원도 소득 수준에 맞춰 차등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꿔 더 많은 불임 부부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