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가 무너지니 산유국들도 ‘끙끙’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11.04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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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폭락으로 경제 위기 몰려…미국에 “화해하자”

▲ 러시아의 푸틴 총리,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미국의 부시 대통령(왼쪽부터). ⓒEPA / AP연합

2001년 9월11일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을 때 일단의 테러리스트들은 중동의 어느 밀실에서 킬킬대며 웃었다. 어쩌면 아프가니스탄 동굴 속에서도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부하들이 미국에 내리는 알라 신의 저주를 박수로 환호했을지 모른다. 바로 이날 세계 최강대국의 치욕을 즐긴 군상이 또 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러시아의 푸틴,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그들이다.

지난 7월 리먼 브러더스와 AIG가 상징하는 월스트리트가 붕괴될 때 이들 3명의 대통령들은 또 웃었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던 미국의 시대가 마침내 종말에 다가가는 조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엉뚱한 결과가 나타났다. 지난 여름 배럴당 1백70달러까지 치솟던 유가가 지난 몇 주 동안 60달러로 추락했다. 금융 위기의 파편이 산유국에 떨어진 것이다. 중동,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미국에 도전하던 반미 국가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유가가 즉각 회복되지 않으면 베네수엘라와 이란은 미국보다 더 심각한 경제난국에 빠질 위험에 처한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유가가 95달러 수준으로 오르지 않으면 두 나라는 국정을 운영할 수 없다. 러시아로부터 수십억 달러의 무기를 구매해서 미국을 견제하는 사회주의 추진 과업도 불가능해진다.

베네수엘라·이란, 유가 95달러 안 되면 국정 운영 불가능

베네수엘라는 그동안 유가 상승 덕분에 생긴 돈으로 배고픈 사회주의 인민들을 달랬다. 이란은 국내 석유회사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했다. 차베스와 아마디네자드가 사회주의 프로그램을 아무리 지속하고 싶어도 지금과 같은 유가로는 어쩔 수가 없다. 중동의 하마스나 헤즈볼라 같은 테러 그룹 혹은 쿠바의 카스트로 같은 혁명 동지들을 더 이상 지원할 수도 없다. 차베스는 이미 니카라과의 오르테가 대통령에게 약속한 40억 달러의 원조를 취소한다고 통보했다.

이들 국가에 비해 석유 수익 의존도가 덜한 러시아도 사정은 나을 것이 없다. 러시아는 외국 투자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의 주가 총액은 지난 봄 이후 70% 감소했다. 그루지야 침공은 외국 자본 유출을 부채질했다. 푸틴 총리는 유동성 위기에 빠진 은행에 2천억 달러를 투입했다. 푸틴은 과거 여러 차례 유럽에 대한 에너지 공급을 중단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석유나 천연 가스를 무기로 쓸 여지가 없어졌다.

이들 반미 세력들의 석유 수입 감소로 미국에 대한 적대 강도가 약화될 것이라는 얘기가 벌서부터 나돌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최근 이라크 내 유엔군의 주둔 기간 연장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이란은 하마스와 헤즈볼라 그리고 이라크 내 ‘특수그룹’에 대한 지원을 잠정 중단했다. 이 테러 그룹들도 최근 몇 달 동안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거의 하지 않았다. 

오바마와 매케인이 마지막 TV 토론에서 베네수엘라에 대한 석유 의존을 10년 안에 영구히 중단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차베스였다. 그는 즉각 TV에 나타나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라 마주 앉아 공존을 애기할 때이다. 우리는 서로 필요하다”라고 호소했다. 미 제국주의를 타도하겠다고 호언하던 그의 입에서 미국 대통령 후보들에게 화해를 청하는 메시지가 나온 것은 뜻밖이다. ‘볼리비아 혁명’이 미국에 평화의 손짓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차기 미국 대통령의 책상에 그런 제안서가 수없이 쌓일 날이 온다는 얘기가 된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에도 비상이 걸렸다. 석유를 수출해 얻는 수입에 모든 것을 의존하던 산유국들은 거의 절망 상태에 빠졌다. 이들은 긴급 회의를 소집해 감산을 결정했다.  감산 조치로 유가가 반등하기를 바라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함정이 있다. 유가 반등이 침체에 빠진 세계 경제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넣는다면 유가 하락은 장기화할 수 있다.

OPEC 석유장관들은 10월24일 하루 1백50만 달러를 감산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총 산유량의 5%에 해당한다. 그러나 유가는 하락을 멈추지 않았다. 이 발표가 있은 후 브렌트 유가는 60달러로 내렸다. 지난 7월 1백45달러였던 때를 생각하면 어디까지 추락할지 모른다.

이유는 수요 급감에 있다. 최대 석유 소비국 미국의 수요가 5년 이래 최저로 줄고 고도성장을 하던 아시아의 석유 소비도 대폭 줄었다. 세계의 평균 석유 소비량이 감소한 것은 25년 만에 처음이다.  
 
소비 감소는 석유 달러로 흥청대던 산유국들에 치명적이다. 석유 수입으로 핵까지 개발하던 이란은 90달러 선 회복을 고대한다. 베네수엘라는 최소한 100달러 선은 되어야 뭔가를 할 수 있다. 유가 하락은 감산을 초래한다. 감산은 다시 소비 감소를 가져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이다.    

석유수출국 감산 조치에도 ‘내리막길’ 여전

▲ 쿠웨이트 투자자들이 주식 시세가 크게 떨어지자 난감해하고 있다. ⓒAP연합

산유국들은 부시 대통령이 석유 때문에 이라크를 침공했다고 비난했다. 부시는 석유를 무기화하는 ‘오일 내셔널리즘’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응수했다. 오일 내셔널리즘에는 러시아와 베네수엘라가 앞장을 섰고 에콰도르, 볼리비아, 심지어 태국까지 뒤를 따랐다.  고속 경제성장과 함께 오일 먹는 하마로 등장한 중국과 인도도 거들었다. 

유가 상승으로 재미를 본 산유국들은 배럴당 20달러 하던 1990년대에 체결된 생산 계약을 고쳤다. 80달러가 되니까 또다시 조건을 강화했다. 그러던 중 기후 변화에 따른 이상 난동으로 소비 감소 현상이 나타났다. 이때만 해도 다급하지는 않았다.

미국발 금융 쓰나미는 차원이 다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세계 산유량의 40%를 차지하는 OPEC가 이 지경이면 여타의 나라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오일 내셔널리즘은 에너지 안보 확립이라는 긍정적 명분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자주권을 해치는 자체 모순을 안고 있다. 유가가 무제한 오를 수는 없다. 이른바 오일 자주권을 추구하는 나라들이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산유국들은 석유를 팔 곳이 없어진다. 그때 유가는 폭락할 것이다. 그 운명의 시간은 금융 위기로 앞당겨졌다. 유가 폭락은 산유국들의 경제를 망가뜨리고 그 파장은 전세계 소비국으로 확산된다. 그러면 모두 망하는 사태가 온다. 일방주의 외교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사면초가에 빠진 부시에게도 햇볕이 들었다. 군사력으로도 통제할 수 없었던 적대국들이 돌연 미국에 평화의 제스처를 보내오고 있다. 지금은 부시가 백악관에서 웃고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외교적으로는 부시의 고집이 결실을 거두고 있으니 말이다. 9·11 테러를 자행한 세력이 이번에는 미국발 금융 테러에 당한 꼴이 되었다. 비록 의도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얄궂은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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