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 거물들 ‘한국 자산 털기’시작했다
  • 이철현 편집위원 ()
  • 승인 2008.11.04 04:4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본 시장 개방과 함께 물밀듯이 들어왔던 외국 자산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달러화를 비롯한 유동 자산은 물론이고 무려 3조원이 넘는 규모의 외국인 소유 부동산이 이미 팔렸거나 매물로 나돈다. ‘한국판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옛 나산백화점이 지난 10월31일 무너져내렸다. 재개발 공사 현장이 붕괴되면서 인부가 매몰되는 사고였다. ‘귀신 붙은 빌딩’이라는 시중의 험담을 현실화하기라도 하듯 최악의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이 건물이 달갑지 않은 별칭을 얻게 된 것은 이를 사들인 업체마다 어김없이 몰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세계 4위 투자 은행이라는 명성을 자랑하던 리먼브러더스도 이 건물을 매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산했다. 리먼브러더스는 SK건설 자회사 SKD&D와 총 2천억원을 투자해 이 터에 지하 6층, 지상 20층에 달하는 오피스 건물을 짓고자 했다.

리먼브러더스는 지난 9월 중순 파산이 발표되자마자 해당 사업의 지분 49.51%를 시장에 매물로 내놓았다. 파산 보호 신청으로 인해 자산 처분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예상보다 빨리 매물로 다시 나온 셈이다. 해당 지분을 매입한 곳은 합작 상대 업체인 SKD&D이다. 리먼브러더스는 제3자 매각을 추진하다 실패하고 지난 10월15일 1백1억2천만원이라는 헐값으로 이 땅에 대해 갖고 있던 지분을 매각하고 말았다.

메릴린치·한국씨티은행 등 빌딩 매각 나서

이 사건이 ‘셀 코리아(외국 금융 기관의 한국 자산 매각)’의 출발 총성이 된 것일까? 리먼브러더스가 옛 나산백화점 지분을 매각하자마자 외국계 금융 기관들이 앞다투어 매물을 쏟아내고 있다. 잘나갈 때 한국의 대형 빌딩들을 먹어치웠던 외국 금융 기관들의 ‘한국 엑소더스’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독일계 대안 투자 업체인 리프(RREEF)는 일찌감치 서울 여의도에 있는 대우증권 빌딩을 대우증권에 1천8백20억원에 팔아 1년 만에 7백억원이라는 매각 차익을 얻었다. 리먼브러더스는 서울 동대문 상가 라모도빌딩을 내놓았고, 미국 부동산 투자 기관 GE리얼에스테이트는 서울 논현동에 있는 트리스빌딩과 경기도 분당에 있는 초림빌딩을 팔기 위해 신영에셋을 매각 자문사로 선정했다.

▲ 미국에는 이미 구조 조정 태풍이 몰아쳤다. ⓒ연합뉴스

메릴린치도 서울 종로구 서린동 소재 SK빌딩을 내년에 매물로 내놓을 계획이다. 메릴린치는 호가가 6천억원이나 되는 해당 자산을 당장 팔아 1천6백원 넘는 매각 차익을 실현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메릴린치는 지난 2005년 해당 자산을 매입하면서 5년 동안 매각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수락했다. 매각 제한 규정에서 벗어나는 내년에는 SK그룹과 매매 협상에 들어갈 전망이다. 세계 최대 보험업체인 AIG는 서울 여의도에 있는 국제금융센터(IFC) 지분을 파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겠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매매 협상이 진행되지는 않고 있지만 유동성 위기에 빠진 AIG가 투자 회수 기간이 긴 해당 자산을 계속 소유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계 보험사인 ING생명보험도 서울 대학로 소재 은석빌딩을 매각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국씨티은행은 인천 구월동 소재 주전산센터가 입주해 있는 건물을 매물로 내놓았다. 한국씨티은행은 이곳을 5백50억원에 팔되 해당 자산을 다시 임대해서 사용하려 한다. 이른바 ‘세일앤리즈백(Sale & Lease back)’으로 유동성이 부족한 업체가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쓰는 매각 방식이다. 한국씨티은행은 매각 자문사로 BHP코리아를 선정해 매각을 서둘렀으나 어찌된 일인지 최근 매물을 회수했다.

그렇다고 한국씨티은행의 유동성이 갑자기 개선된 것은 아니다. 외국 금융 기관들이 서울 매물을 쏟아내다 보니 가격이 급락하고 있다. 게다가 매수 주체마저 사라졌다. 국내 기관 투자자나 유동성이 풍부한 대기업마저 부동산 신규 매입을 중단하는 바람에 마땅한 매수자를 찾기 어렵다. 어쩌다 나타나는 매수자는 중동 펀드이거나 싱가포르 투자 기관들인데 터무니없는 값을 제시한다. 이 탓에 한국씨티은행 RE자산관리팀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본사에서는 서둘러 팔라고 하지만 제 값을 받기 어려운 형편이다. 한국씨티은행 RE자산관리팀 관계자는 “카타르 QIA펀드나 싱가포르 GIC RE 같은 외국 투자 기관은 투자수익률(yield)로 10%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값은 터무니없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국씨티은행 관계자는 "6월말 기준으로 총자산 55조원, 고객대출자산 28조7천억원에 2천5백69억원의 순이익을 거두었다. 한국씨티은행은 신용등급은 물론 유동성 비율에서도 달러나 원화 기준으로 업계 최고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가격 계속 내려가 매각에도 애먹어

금융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국내 오피스 빌딩 수익률은 5% 내외였다. 상가 시설도 6%를 넘기가 쉽지 않았다. 그마저 매물이 나오지 않았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CBD(도심 상업지)나 강남 테헤란로 주변에서 팔겠다는 빌딩이 없었다. 공실률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던 것이 최근 몇 달 사이에 극적으로 반전했다. 홍상무는 “잠재 매물까지 포함하면 외국 금융사들이 팔고자 하는 부동산 값이 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말했다. 메릴린치만 해도 수도권에 투자한 부동산 자산이 1조원가량 된다. 매물이 늘어나니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 가격 급락 추세는 더 극적이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시가보다 10% 낮게 호가가 형성되었으나 이제 20% 이상 하락했다.

부동산 투자자들은 부동산을 생선에 비유한다. 좌판에 올라 있는 생선을 소비자가 만지다 보면 팔기 전에 생선이 상하듯이 잠재적 매수자가 물건을 사지 않고 만지작거리다 보면 건물 가치가 떨어진다. 외국 금융 기관들이 어쩔 수없이 매물을 회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본사는 팔라고 재촉한다. 유동성 부족 현상이 심각한 데다 금융시장이 얼마나 악화할지 판단되지 않는 상황에서 현금 확보는 유일한 생존 대안이기 때문이다. 미국 투자 은행들은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로부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구제금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 미국 은행들이 전세계 자산을 처분해 유동화하려 하고 있다. 세계 5대 투자 은행으로 꼽는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리먼브러더스, 베어스턴스 가운데 어느 곳 하나도 온전한 곳이 없다. 

미국 상업 은행들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세계 최대 금융그룹인 씨티콥스도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미국 최대 상업 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도 대규모 감원에 나설 정도로 자금 사정이 어렵다. 미국 월스트리트 소재 투자 은행인 RBC에 근무하는 한국인 김선일씨는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자금이 풍부해서 메릴린치를 인수한 것이 아니다. 여수신 기관이다 보니 투자 은행보다 자금 사정이 상대적으로 나아서 떠안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과 함께 전세계 금융시장을 주도한 영국과 독일 투자 은행도 정부로부터 천문학적인 액수의 자금 지원을 받아야 생존이 가능하다. 자국 내에서 탁월한 투자 성과를 냈던 호주 맥쿼리 은행도 올해 실적이 크게 나빠지면서 서울 충무로 소재 극동빌딩을 매물로 내놓았다.

외국 금융 기관들은 비교적 처분이 용이한 주식이나 채권은 최대한 팔아치우고 있다. 주식과 채권 자산의 매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이제 부동산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김성수 콜드웰뱅커코리아 사장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국내 부동산 자산을 대량 매입하면서 국내에 들어왔던 외국 금융 기관이, 이제 국내 부동산 자산을 매각하면서 국내 투자를 마무리하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