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쓰나미에 떠내려가는 ‘국제 미아’들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12.0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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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 중국 환심 사려 티베트·미얀마 외면

▲ 미얀마와 티베트 문제가 강국들의 논리에 ‘찬밥’ 신세가 될 처지에 놓였다. 가운데 위는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오른쪽은 후진타오 중국 주석. ⓒAP연합

세계 금융 위기가 엉뚱한 희생자를 만들고 있다. 급전이 필요한 영국과 미국이 중국에서 돈을 빌리는 조건으로 티베트와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포기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내고 있다. 경제 사정이 다급해지자 서방 강대국들은 앞을 다투어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일례로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지난 10월 중국에 국제통화기금(IMF) 긴급 지원을 요청하면서 대신 티베트에 대한 종래의 입장을 변경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 때문에 베이징에 특사를 보내 티베트 망명정부의 승인 문제를 논의하던 협상은 사실상 교착 상태에 빠졌다. 협상 교착 소식은 영국 외교부가 티베트를 자치정부로 인정해온 기존 입장을 변경한다고 발표한 직후에 나왔다.

영국 외교부는 지난 10월29일 성명을 통해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며, 진작 이런 결정을 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영국은 티베트를 자치정부로 인정하고 중국은 티베트에 대해 ‘특수 지위’를 보유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런 합의가 티베트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나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통제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영국은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중국이 1951년 티베트를 점령하기 전 티베트 정부의 지위에 관한 국제적 합의에 서명했다. 이 합의가 공식적으로 폐기되지 않은 상황에서 티베트에 대한 영국의 입장 변경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이 1971년 유엔에 가입한 이후 영국은 베이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티베트를 자치정부로 인정한다는 말을 가급적 자제해왔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베이징은 그 후 30년간 완전한 자치권 보장을 골자로 하는 협상을 했으나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영국의 태도 변화로 티베트가 누리던 최소한의 자치권마저 희미해졌다.

영국은 금융 위기 속에서 티베트의 민주주의보다 중국의 돈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특히 티베트 문제를 중국에 양보하는 과정에서 이중 플레이를 해 빈축을 샀다. 외교부는 영국의 양보가 중국의 입장을 완화시켜 달라이 라마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비판자들은 이를 매우 비겁한 처사라고 비난했다.

미얀마 군부와 중국의 긴밀한 관계도 대미얀마 정책에 걸림돌

 중국 언론은 영국의 양보를 환영하면서도 이는 순전히 금융 위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영국의 배신은 중국이 티베트에서 획득한 가장 중요한 성과물이 될 듯하다. 미국도 한때 티베트 독립군을 지원했으나 닉슨의 베이징 방문 이후 중단했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금융 위기를 해소하는 국제적 노력에 중국을 참여시키는 것은 좋으나 역사를 다시 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미얀마도 금융 위기의 유탄을 맞았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의 외교 담당 보좌관들이 부시의 대미얀마 정책을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선양하고 반체제 인사들을 지원하겠다는 부시의 약속은 과장된 것이었으며 부시는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오바마 팀의 판단이다. 이들은 또한 부시의 약속이 애당초 실현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비현실적이었다고 지적했다. 미얀마의 민주 투사 아웅산 수치 여사를 비롯한 반정부 인사들은 미국의 민주주의 원칙이 미얀마에서 퇴색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는 미얀마에 관한 한 부시의 정책이 옳았다고 본다. 따라서 차기 오바마 행정부가 지나친 실용주의에 탐닉해 대미얀마 정책을 후퇴시킨다면 큰 실책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마침 미얀마 군사정부는 차기 오바마 행정부의 분위기를 눈치 챈 듯 지난주 비밀 군사재판을 통해 1백50여 명의 반정부 인사들에게 수십 년씩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형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승려, 학생, 블로그 운영자들이 포함되었다. 한 유명 코미디언은 싸이클론 나르기스가 강타했을 당시 이재민을 도왔다는 이유로 45년형을 받았다. 14개월 전 평화적 시위를 주도한 승려는 68년형을 받았다. 지난해 봄 가짜 국민투표 현장을 촬영한 기자는 14년형을 받았다. 이들을 변호한 변호사들도 중형을 받았다.

미얀마 군부가 폭정을 주저하지 않는 배경에는 중국의 비호가 도사리고 있다. 중국은 미얀마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반입하기 위한 25억 달러의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중국은 미얀마의 폭정을 국익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다. 탄압을 묵인해주면 일을 추진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무자비한 탄압을 보고 한때 차기 오바마 행정부에 미얀마와의 대화를 촉구했던 인권단체들도 이런 식으로 변질되는 사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수치 여사가 이끄는 국민민주동맹은 20년 전 선거에서 압승했다. 군부는 그러나 선거 결과를 무시하고 그녀를 근 20년째 가택 연금한 채 민주주의를 묵살하고 있다. 수치 여사는 남아프리카의 만델라처럼 미얀마 민주주의의 희망이자 국민의 실질적인 지도자이다. 미얀마가 언젠가 민주화되는 날 수치 여사와 그 국민은 기억할 것이다. 고난의 시기에 누가 자기들을 도왔고 누가 배신했는지를. 그때 가서 미국이 우리도 당신들 편이라고 나선다면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경제 때문에 팔려가는 희생자, 미얀마·티베트로 끝나지 않아”

남아공의 인종 차별이 종식된 것은 서방 강대국들의 지원 덕분이었다. 미얀마도 그런 지원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차기 오바마 행정부가 경제 사정을 이유로 대미얀마 정책을 바꾸면 이 나라 국민의 고통은 그만큼 연장된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외교의 핵심인 민주주의 원칙을 변경할 경우 미얀마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 특히 아랍 국가에서 테러 활동이 가열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은 경제 이익을 앞세워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재를 묵인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다수 국가가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데는 중국에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는 얘기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로 민주주의 원칙이 무너지면 기후 변화나 질병 예방 같은 국제적 도전을 해결하는 데 국가 간 협조도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도 실익만 추구할 입장이 아니다. 지금까지 미국이 세계 무대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미국의 민주주의 원칙이 새 행정부의 어느 대목엔가 살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행여 예산·조직·인사 면에서 이 원칙이 축소되는 낌새가 보인다면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세계 경제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민주주의는 원칙은 더욱 고수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불길한 조짐이 최근 러시아에서도 나타났다.

푸틴 총리는 부시의 대러시아 대결 정책을 은근히 비난하면서 차기 오바마 행정부와 선린 관계를 구축하기를 바란다고 천명했다. 얼핏 보면 좋은 얘기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속셈은 미국의 쇠퇴를 틈타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하는 것이다. 푸틴을 대통령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헌법 개정안이 발의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바마 당선인이 부시처럼 민주주의 신념을 고수해도 러시아는 권위주의의 길을 갈 것이 뻔하다. 하물며 오바마가 실익을 내세워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면 푸틴은 더욱 신바람을 낼 것이다.

 이제 문제는 경제 때문에 팔려가는 희생자가 티베트나 미얀마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칫하면 경제도 민주주의도 다 놓치는 우행의 종착역으로 갈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뉴욕타임스는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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