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직전 자본주의’에 고함
  • 조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08.12.30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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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지성’ 앙드레 고르가 예리한 통찰력으로 들려주는 ‘위기와 대안’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앙드레 고르는 2007년 9월22일 자택에서 불치병으로 투병 중이던 아내와 함께 동반 자살했다.

당시 세계 언론은 팔순이 넘은 두 부부의 죽음을 긴급히 전했는데,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추모 성명을 발표하며 “평생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심층 분석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라고 앙드레 고르를 추억했다.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평가했던 그런 중요한 사상가를 아는 이가 별로 없었던 것은, 앙드레 고르가 병든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 20여 년 전에 공적인 활동을 접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내게 삶의 풍부함을 알게 해주었고, 나는 당신을 통해 삶을 사랑했습니다. …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나는 내 앞에 있는 당신에게 온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걸 당신이 느끼게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삶 전부와 당신의 전부를 주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 동안 나도 당신에게 내 전부를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D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동반 자살하기 전 고르는 두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한 권은 그가 자살하기 1년 전 아내를 위해 쓴 <D에게 보낸 편지-어느 사랑의 역사>이다. 그의 죽음으로 세상은 그의 사상보다 그의 사랑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아내가 그의 모든 것이었다고 고백한 그 글들은 한국 연인들의 마음도 울렸다.

또 한 권은 최근 국내에 소개된 <에콜로지카>이다. 이 책은 이미 발표된 그의 글 중 그의 사상이 요약·집중되어 있는 7편을 생전 고르가 직접 선별해 엮은 책으로, ‘생태주의자’라고 자칭했던 사상가답게 자신의 사상을 정갈하게 집약해 들려주겠다는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가 죽은 뒤 터진 미국발 금융 위기로, 그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루’한 사상가가 아니라 미래를 예견한 위대한 사상가 ‘고르’의 역작임이 드러났다.

‘공동 협력 자율 생산’ 프로젝트 제안해

▲ 젊은 시절 앙드레 고르 부부의 사진이 담긴 (학고재 펴냄).
고르는 ‘붕괴 직전의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그 다음 단계를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요목조목 제시했다. 고르는 일찍부터 “미국 기업들이 얻는 이윤의 절반이 금융시장의 조작에서 나온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축적된 자본의 점점 많은 부분이 금융 자본의 형태를 유지하기 시작하면서 오로지 다양한 형태의 돈만을 사고팔면서 돈 버는 법을 끊임없이 세련되게 만드는 ‘금융 산업’의 폐해를 지적했다. 그는 금융 산업이 흡수하고 관리하는 ‘자본덩어리’에 대해 “이 자본의 ‘가치’는 순전히 허구적인 것이다. 이는 대부분 부채와 ‘선의’, 즉 앞날에 대한 예견에 근거하고 있다. 예컨대 … 주식 시세는 자본과 그 자본이 내게 될 부가가치로 부풀어오르고, 각 가정은 은행으로부터 다른 무엇보다도 주식을 사라는, 그리고 부동산에 투자하라는 재촉을 받는다. … 그러다가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오게 되면 부풀어오른 이 거품은 꺼지고, 은행들은 줄줄이 도산하고, 전세계적 신용 체계는 붕괴 위험에 처하고, 실물 경제는 오래도록 이어지는 극심한 불황의 위협을 받는다”라고 내다보았다.

고르는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해 들려주기도 했다. 자본주의 논리와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난 ‘공동 협력 자율 생산’이라는 새로운 생산 양식과 문화가 그것이다. 그는 ‘더 많이 생산하고 더 소비해야 한다’라는 시장경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에서도 벗어나고 노동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도 탈출하라고 주장했다. 임금 노동 철폐, 생계수당 지급,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최소한의 노동과 최대한의 자율 영역을 확보하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성장’ 이데올로기에 조장되지 않은 진정한 ‘필요’와 ‘욕망’에 따라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고르의 대안이다.

고르가 주장한 일자리 나누기, 생계수당 등을 포함한 ‘공동 협력 자율 생산’ 같은 프로젝트는 유럽을 중심으로 많은 국가에서 현실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192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 1946년 사르트르를 만난 이후 실존주의와 현상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49년 프랑스로 이주해 파리프레스, <렉스프레스> <레탕모데른> 등에서 경제 전문 기자이자 탐사 취재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던 앙드레 고르. 1660년대 이후 신좌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하며 프랑스 68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일자리 나누기와 최저임금제의 필요성을 역설한 선구적인 노동이론가이자 생태주의를 정립한 초기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그는 <에콜로지카>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정리한 듯하다.

사경을 헤매는 아내에게 극진한 사랑을 전했던 ‘편지’ 때문일까. 이 책 또한 전세계인에게 보내는 절절한 사연으로 읽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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