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타고 온 ‘어제의 용사’들
  • 김지훈 (서울신문 기자) ()
  • 승인 2009.02.17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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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재·보선 앞두고 거물급 재등장하자 여야 모두 초긴장…공통점은 “당내 혼란 부른다”

▲ 재단법인 ‘동행’ 창립 기념 세미나를 통해 정치 활동을 재개하는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위 오른쪽)와 그를 축하해주는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위 왼쪽).

정치의 계절이 오고 있다. 2월 임시국회가 끝나면 여의도에 부는 봄바람과 함께 가슴 설레며 정계 복귀를 꿈꾸는 ‘어제의 용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이들 ‘올드 보이’들은 여의도 주변을 기웃거리며 4월 재·보선을 향해 활발하게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다. 한나라당의 박희태 대표와 강재섭 전 대표,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자천 타천으로 4월 재·보선 출마가 거론되고 있고, 민주당에서도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과 동교동계인 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재·보선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

재·보선을 앞두고 흘러간 거물들이 등장하는 일은 흔히 있었지만,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의 귀환이 각 당의 역학 구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파급력이 크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주류인 친이(친이명박) 진영이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가운데, 친박(친박근혜) 진영이 세를 확산하며 계파 갈등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당도 대선과 총선에서 연거푸 패배해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올드 보이’들의 복귀 여부가 당내 긴장도를 높이고 있다. 뒤집어 보면 여야 모두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 이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강재섭 전 대표 측근 “5선 의원이 뭐가 아쉬워 출마하나”

특히 여당의 경우 당내 정치 지형을 흔들 정도의 거물들이 대기하고 있다. 강재섭 전 대표는 지난 2월10일 재단법인 ‘동행’ 창립식과 기념 세미나를 갖고 사실상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강 전 대표는 지난해 7월 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공식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었다. ‘동행’에는 강 전 대표의 측근들인 이종구·이명규·나경원·정진섭 의원 등이 주축이 되어 40명에 달하는 의원이 설립위원으로 참여했다. 정치권에서는 ‘동행’을 강 전 대표가 큰 꿈을 품고 차린 싱크탱크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는 이날 인사말에서 “국민 통합을 해야 하는데 당내에서도 통합하지 못하고 싸우면 안 된다”라며 앞으로 친이계와 친박계 사이에서 독자적인 역할 공간을 찾아갈 것임을 시사했다.

강 전 대표의 이같은 행보를 놓고 정치권에서는 4·29 재·보선과 차기를 염두에 둔 포석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강 전 대표측은 “강 전 대표는 재·보선에 나오지 않는다”라며 강하게 반박한다. 그의 한 측근은 “5선까지 한 정치인이 뭐가 아쉬워 국회의원 한 번 더하려고 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강 전 대표는 원내에 진입하기보다는 내심 행정부 쪽에서 일할 기회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 내에서는 당장 2월 임시국회가 끝나면 새로운 원내지도부를 선출하고 이어서 4·29 재·보선 공천, 당협위원장 교체 등 민감한 정치 일정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의 복귀를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다. 강 전 대표는 지난 대선 후보 경선 때도 중립을 표방하면서 친이계와 친박계가 일촉즉발까지 갔던 분란을 봉합해 나름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강 전 대표의 복귀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복귀이다. 3월 초 귀국할 것으로 알려진 그는, 이명박 정권 탄생의 1등 공신이었지만 18대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당내 갈등의 진원지라는 말을 들으며 자의 반 타의 반 외유 길에 올랐다. 그가 복귀하면 여권의 구심점이 형성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친박 진영을 자극해 계파 갈등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더 우세하다. 친박 진영은 그의 복귀를 앞두고 모임을 통합하는 등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를 의식한 듯 그의 한 측근은 “이 전 의원이 귀국하더라도 낮은 행보를 이어갈 것이다”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주목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표정이다. 이 전 최고위원도 자신의 64번째 생일을 맞은 2월5일 팬클럽 회원들에게 “미국에 간 목적을 달성한 만큼 더 이상 해외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 정치적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월6일 정두언 의원을 중국으로 보내 이 전 최고위원에게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최고위원이 당분간 정치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 후방에서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연구해달라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당 안팎에서는 과연 이 전 최고위원이 귀국 이후 ‘로우키’(low key) 행보를 지속할 수 있을지에 의구심을 나타내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박희태 대표의 4월 재·보선 출마는 향후 국정 운영의 틀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파급력이 크다. 박대표는 “시간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심하겠다”라고 말했지만 이미 출마의 뜻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유력하게 거론되는 지역구는 의원직을 상실한 같은 당 구본철 전 의원의 인천 부평 을이다.

하지만 대표직을 갖고 출마할지, 떼고 출마할지와 당선될 경우와 낙선될 경우에 따라 여권 전체에 미치는 파급력이 만만치 않다. 그가 여당 대표직을 달고 출마한다면 4월 재·보선은 이명박 정부의 중간 평가라는 의미를 띨 수 있다. 전통적인 보수층마저 이명박 정부에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수도권에서 박대표가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여당 대표가 선거에서 진다면 상당한 후폭풍이 불 것이다. 그렇다고 대표직을 던지고 출마하기에도 적잖은 부담이 있다. 그가 대표직을 내놓는다면 조기 전당대회를 치를 수도 있다. 한나라당의 계파 갈등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전당대회를 치른다면 분열과 자중지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박대표측은 내부적으로 대표직을 달고 출마한다고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대표측의 한 관계자는 “이회창 전 총재도 1999년에 총재직을 유지한 채 재·보선에 출마한 적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박대표가 원내에 입성한다면 여권 내 구심점으로서 위상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여권이 그동안 중진들의 낙천과 낙선으로 인해 발생한 정치적 공백을 그가 메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측근은 “그동안 원외 대표의 한계를 절감했다. 민주당이 입법 전쟁 때도 정세균 대표가 일일이 뒤에서 코치하고 협상안 결재하면서 성과를 내놓은 것 아니냐”라면서 재·보선 출마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 이재오 전 의원(왼쪽),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오른쪽). ⓒ시사저널자료(왼쪽) , 시사저널 이종현(오른쪽)

정동영 “출마 신중하게 생각하고 과단성 있게 결정할 것”

민주당에서는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의 복귀 문제가 뜨거운 논란거리이다. 정 전 장관의 전주 덕진 출마설이 퍼지자, 민주당은 곧바로 계파 갈등에 돌입했다. 정세균 대표의 신주류측과 DY계(정동영계)인 구주류측이 날선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

송영길 최고위원은 “현재 맡은 지역이 어렵다고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것은 정도의 정치가 아니다”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정 전 장관은 현재 서울 동작 을 당협위원장이다. 그의 출마를 반대하는 이들은 “동작 을 현역 의원인 정몽준 의원의 재판이 진행 중인데 최소한 재판 결과는 지켜봐야 하지 않느냐”라고 반발한다. 당이 어려운데 편한 지역구만을 노린다는 것이다. 한 재선 의원은 “정 전 장관은 대선 패배의 원죄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정 전 장관은 “신중하게 생각해서 과단성 있게 결정하겠다”라는 말을 던져놓고 막판 고민 중이다.

재단법인 ‘동행’ 창립 기념 세미나를 통해 정치 활동을 재개하는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위 오른쪽)와 그를 축하해주는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위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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