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되살아나는‘빨간 책’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9.03.2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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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자본주의 흔들리며 <자본론> 다시 각광…서적 이어 연극·다큐멘터리 영화까지

▲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으면서 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왼쪽은 독일 베를린에 있는 마르크스(왼쪽)와 엥겔스 동상. ⓒAP연합

이른바 ‘진보’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던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책장 한가운데 어김없이 주황색의 하드커버 책자 한 권을 꽂아놓은 적이 있었다. 김수행 전 서울대 교수에 의해 옮겨진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변혁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난해한 <자본론>을 제대로 읽고 이해한 사람이 얼마 되지 않겠지만 마르크스주의와 <자본론>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2000년대 들어 <자본론>은 흘러간 유행가 대접을 받았다. 1980년대에는 김수행 교수의 강연이 있으면 1천여 명씩 강의실에 몰리기도 했지만, 지난해 김교수가 퇴임하고 난 이후 서울대는 아직까지 마르크스 경제학자를 뽑지 않고 있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상아탑에서도 <자본론>이 외면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수순을 밟는 듯이 보이던 <자본론>과 마르크스의 사상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를 주무르던 미국식 자본주의의 몰락이 가져온 경제 불황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내재적인 모순을 규명한 자본론을 통해 현재의 경제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지혜의 단초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반영된 것이다.

일본 만화 <자본론>, 중국이 뮤지컬로 옮겨

마르크스의 고향인 독일에서는 지난해 <자본론>의 판매량이 전년에 비해 3배나 늘었다. 진보적인 연극 집단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이 선보인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연극 <칼 마르크스 : 자본론 제1권(Karl Marx : Das Kapital, Erster Band)>은 평단과 관객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해외 공연에 나섰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말 출간된 만화 <자본론>이 초판 2만5천부가 10일 만에 매진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노동자를 착취하다가 세계적 경제 위기에서 도산하는 한 우유 공장 사장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론>의 핵심을 알기 쉽게 설명한 이 작품은 중국에서 뮤지컬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론>을 자본주의 공연예술의 꽃인 뮤지컬로 담아내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자본론>을 비롯한 각종 이론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중국에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열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자본론>을 다시 보려는 움직임이 한국에서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출판계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지난해 6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 독일어 원본을 번역한 <자본 Ⅰ-1> <자본 Ⅰ-2>가 출간되었다. 20여 년 전 당시 금서로 묶여 있던 <자본론>의 첫 번역 작업에 참여했던 동아대 경제학과 강신준 교수가 원본 번역 작업에 나선 것이다. 지난 1월에는 전문 인터뷰어로 활동하고 있는 지승호씨가 김수행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을 책으로 엮어낸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 경제를 말하다>를 펴냈다. 이 책에서 김교수는 지금 시대에 자본론을 찾는 이유에 대해 “자본주의는 일부 사람들이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을 해서 자기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특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기본 특성은 마르크스 당대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일부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문제는 여전히 생기고 있으니까.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가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그 토대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시대에 <자본론>을 다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자본주의는 안 바뀌어”

공연계에서도 <자본론>을 주목하고 있다. 국제다원예술축제인 <페스티벌 봄 2009>(3월27일~4월12일)는 ‘마르크스, 서울에 오다’라는 제명으로 해외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재조명하는 리미니 프로토콜의 연극 <칼 마르크스 : 자본론 제1권>(3월27일 8시·28일 6시·아르코 예술대극장)과 독일 뉴 저먼 시네마의 대부인 알렉산더 클루게의 9시간짜리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이념적 고물로부터의 뉴스 : 마르크스-에이젠슈테인-자본론>(3월27일 자정·하이퍼텍나다)을 초청했다. <페스티벌 봄 2009>는 국내 지식인들이 참여해 초청된 작품들과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논하는 포럼도 준비했다.

개막작인 <칼 마르크스 : 자본론 제1권>은 마르크스주의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발현되는지를 전문 배우가 아닌 9명의 일반인들의 입을 통해 전달한다. 일반인이라지만 이들은 모두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로 이들은 자신의 삶 속에 투영된 자본론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신용카드의 적립금에 돈을 보태 비싼 양복을 맞춘 초기 마오이스트, 백만장자 되기를 꿈꾸는 시각 장애인 콜 센터 직원, 40편이 넘게 작품을 내놓은 영화감독이면서 가끔 방직공장의 포장공 일도 겸하고 있는 대학 강사 등이 연극에 참여한다. 이들 중에 영국 출신의 토마스 쿠친스키는 경제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관한 많은 집필 활동으로 동구권에서 마르크스 이론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전작 <콜 커타>를 처음 국내에 소개한 백남준 아트센터의 김남수씨는 “어떤 이는 <자본론>을 회환과 우수가 가득한 혁명의 교과서로 기억하고, 어떤 이는 돈을 잘 벌게 해주는 경영경제서로 사용하며, 다른 이는 쿠폰 모으는 재미에 취해 망각 속에 빠뜨린 헌책으로 취급한다”라고 설명했다.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이 작품은 이전에 연극에 출연한 경험이 없는 출연자들이 <자본론>이라는 주제 하에 가공되지 않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무대에서 펼쳐 보인다. 페스티벌 봄의 김성희 대표는 “출연자와 미리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본이 있기는 하지만 공연에서 출연자들은 대본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발화한다. 출연자와 관객들의 소통에 의해 변화하는 유기적인 연극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연극을 무대에 올린 리미니 프로토콜은 슈테판 카에기, 헬가르트 하우크, 다니엘 베첼이 조직한 연극 집단으로 특정한 역할 분담 없이 공동 작업을 통해 실험적인 세미-다큐멘터리 연극을 만들어왔다. 먼저 소개된 <콜 커타>는 관객과 공연자와의 1 대 1 전화통화로 이루어졌다. 독일의 연극평론가인 제랄드 지그문트는 이들의 작업에 대해 “그들이 맡는 역할은 연출가보다는 관객의 위치에 가깝다. 이야기는 이미 발생한 상태이다. 문맥을 부여하고 선택하고 집중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관객이 자신들만의 해석적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말이다”라고 평가했다.

연극 <칼 마르크스 : 자본론 제1권>이 독일 사회 구성원들에게 투영된 자본론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공연 이후에 마련되어 있는 포럼 ‘마르크스, 서울에 오다(3월28일 8시·테이크아웃드로잉)’는 한국 사회에서의 자본론의 의미를 짚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공연을 보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포럼에는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조영일 문학평론가, 김은실 이대 여성학과 교수, 인터넷 논객 한윤형씨 등 4명의 패널이 참여한다. 포럼을 주관하고 있는 김남수씨는 “연극과 마찬가지로 각양각색의 감상과 추억과 고백과 설명이 곁들여질 것이다. 이념과 상관없이 21세기 자본주의를 살고 있는 각자의 삶의 흐름을 따라가 보는 진행이 될 것이다. 사회적 신진대사가 부족한 한국 사회가 왜 <자본론>을 읽어야 하는가의 질문을 환기하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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