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중심’ 에서 한국을 쏘아올리다
  • 이환범 (스포츠서울 기자) ()
  • 승인 2009.03.24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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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 WBC에서 저력 발휘 … ‘신흥 강국’으로 인정 받아

▲ 3월18일 일본을 꺾고 WBC 4강 진출을 확정한 한국팀의 봉중근(왼쪽)·이진영 선수가 세리머니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야구가 세계 야구의 중심에 우뚝 섰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에 이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회 연속 4강 진입 달성으로 명실 공히 진정한 야구 강국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1회 대회에서 멕시코, 미국, 일본을 연파하고 4강에 올랐을 때 항상 따라다니던 수식어가 ‘이변’ ‘파란’ ‘돌풍’ 등이었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도 미국 등은 메이저리거가 참가하지 않았다며 의미를 평가 절하했다. 그러나 이제는 충분히 4강에 오를 만한 실력을 지닌 팀으로 인정하고 한국만의 수준 높고 색깔 있는 야구 스타일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야구 종주국 미국의 언론들도 한국의 4강 진입 달성을 비중 있게 다루며 진정한 야구 강국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스포츠 전문 웹사이트 ESPN은 지난 3월19일(이하 한국 시간) WBC 2라운드 한국-일본전 결과를 분석하면서 ‘아시아 야구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이 사이트의 칼럼니스트 호르헤 아랑규어는 “한국이 일본을 꺾은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스카우팅 리포트와는 전혀 다른 결과이다. 아시아 야구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증거로 밖에 볼 수 없다”라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도 3월18일 한·일전 결과를 상세히 보도하면서, ‘한국은 이날 승리로 야구 강국 중에서도 핵심으로 공인받았다’라며 세계 야구의 주류로 인정했다.

더욱이 이번에는 사실상 국내 리그 선수들로 4강에 올랐다. 유일한 메이저리거 추신수가 있지만 실전 감각 부족으로 거의 개점 휴업 상태이다. 순수 국내파로 4강에 올랐다고 해도 무방하다. 1회 대회에서는 박찬호, 김병현, 서재응 등 메이저리거 7명과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는 이승엽 등 8명의 해외파가 중심이었다. 3년이 흐른 지금 이들이 모두 빠진 가운데 한층 젊어진 태극전사들이 자신감으로 무장해 야구 강호들을 연거푸 침몰시키고 있다. 미국 언론들이 한국 야구를 새삼스럽게 강국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스몰볼’과 ‘빅볼’의 절묘한 조화

WBC 홈페이지는 본선 전망을 하며 메이저리거가 단 1명뿐이라는 점 때문에 네덜란드와 함께 한국을 신데렐라로 꼽았다. 말이 신데렐라이지 최약체라는 평가나 다름 아니었다. 철저히 야구의 종가 메이저리그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잣대로 한국의 전력을 평가 절하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고 한국이 빅볼과 스몰볼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멕시코, 일본을 연달아 격파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메이저리그나 일본과는 또 다른 한국만의 야구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흔히 메이저리그를 비롯한 중남미 야구는 빅볼, 한국·일본 등 동양 야구는 스몰볼을 구사한다고 규정짓는다. 실제로 미국, 베네주엘라, 쿠바, 멕시코 등 미주 국가들은 엄청난 홈런 퍼레이드를 벌이며 힘을 과시했다. 언제 어디서든 터지는 홈런포로 인해 승부가 뒤집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국 야구는 기동력 중심에 희생번트 등 다양한 작전을 구사하고 좀더 세밀한 야구를 한다는 점에서는 ‘스몰볼’이라는 평가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 야구는 극단적인 스몰볼을 구사하는 일본과도 또 다르다.

현대 야구에서 이분법적으로 빅볼과 스몰볼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느 쪽으로 중심이 치우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한국은 멕시코전에서 홈런 3방에 다양한 작전까지 완벽히 구사했다. 베이징올림픽에서 무패 행진을 벌인 것도 대포와 기동력 등이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한국 야구 약진의 원동력은 스몰볼과 빅볼의 절묘한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야구 선진국 미국과 일본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우리만의 야구를 창조해낸 것이다.

메이저리거들에 비해 힘에서는 밀리지만 마운드의 다양성과 탄탄한 기본기, 집중력 등은 결코 아래가 아니다. 좌·우완 강속구 투수와 완급 조절에 능한 변화구 투수, 잠수함 투수까지 여러 가지 전형의 투수들을 두루 갖추었다. 메이저리그 스타급 선수들에 비해 이름값은 떨어지지만 구위 자체만 놓고 보면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제구력 면에서는 미주 선수들보다 우위에 있다. 한국은 6경기에서 방어율 2.88의 수준급 마운드에 4구는 14개밖에 내주지 않았다. 베네수엘라(32볼넷), 미국(26볼넷)과 비교해 훨씬 정교한 제구력을 선보였다. 제구력이 좋다는 일본도 19개의 볼넷을 허용했다.

한국은 WBC 본선에서 참가국 중 유일하게 무실책 경기를 펼치고 있다. 1회 대회에서도 박진만 등의 수비는 메이저리거를 능가한다고 찬사를 받은 바 있다. ESPN은 한국 야구가 저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으로 ‘탄탄한 기본기’를 꼽았다. 샌디에이고에 온 4개국 가운데 한국만이 유일하게 타격 훈련 뒤에 어김없이 내야 수비 훈련을 한다고 전하면서 “이런 치밀한 준비로 기본기를 쌓기 때문에 실전에서 세밀한 플레이를 할 수 있다. 한국이 기본기가 좋은 팀이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고, 계속 강조할 필요도 없다”라고 밝혔다.

전혀 다른 야구 전술과 ‘단결’의 힘

SK 김성근 감독은 한국 야구의 강점으로 상황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임기응변 능력을 꼽았다. 김감독은 “대처 능력과 분석력, 승부수를 띄우는 전략과 전술에서 차이가 있다. 일본은 따라 할 수도 없는 전술이 한국 야구에서는 정석으로 통한다. 이 차이가 경기력의 차이를 부른다”라고 밝혔다. 지난 3월16일 경기에서 한국은 1회 말 톱타자 이용규가 좌전안타 후에 도루를 감행한 것이 좋은 예이다. 상대 선발이 다르빗슈 유라는 점을 감안할 때 선취점의 의미가 매우 큰데, 한국은 도루 후에도 강공 작전을 펼쳤다. 김감독은 “이런 대담성을 일본 야구계에서는 ‘무모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이같은 기습 작전을 펼치지 못하지만 한국에서는 정석 플레이가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데이터에 의존하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데이터를 참조한다. 기본적인 지식만 입력해 두고, 경기 상황에 따라 선수들이 스스로 능동적인 대처를 해낼 수 있다는 점도 한국 야구의 강점이다.

일본을 예로 들었지만 한국의 기상천외한 작전에 놀라기는 메이저리그 중심의 미국이나 중남미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작은 선수들이 무모하리만치 공격적인 전술로 상대를 압박하니 기가 질릴 수밖에 없다. 미국 중계 방송팀은 3월16일 멕시코와의 WBC 2라운드 1조 첫 경기 6회 무사 1루에서 이범호가 페이크 번트 동작에서 강공을 펼쳐 상대 수비를 농락한 장면에는 “아, 저런 야구도 있군요”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실 버스터(buster)는 엄연한 야구 용어이다. 공격의 한 방법이다. 이를 모를 리 없지만 적재적소 상황에서 상대를 당황케 만드는 절묘한 작전에 감탄사를 연발한 것이다.

일본 전력분석팀의 니시야마 가즈다카는 “한국 선수들에게는 일본에 없는 믿음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경기를 하다 보면 4번 타자라도 1번 타자의 역할을 할 수 있고, 9번 타자도 4번 타자의 임무를 수행해야 될 때가 있다. 한국은 이것이 된다. 선수들 간의 믿음이 강하다는 것인데, 한국 야구의 저력은 여기서 나오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국 야구의 저변은 넓지 않다. 한 다리 건너면 학연·지연으로 얽혀 모두가 선후배로 묶인다. 당연히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의 단결력이나 팀워크도 좋을 수밖에 없다.

김인식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의 신기에 가까운 용병술과 믿음의 야구도 빼놓을 수 없다. 몸이 불편한 어려운 상황에서 국가대표 사령탑을 맡은 김감독은 선수 구성의 어려움 속에서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선수들이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상의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단이 혼연일체가 된 ‘단결’의 힘이 미세한 실력 차를 극복할 수 있는 원초적인 힘이 되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본토 야구에 대한 도전 의식이다. 메이저리그와 일본이 철저히 자기중심적 사고에 젖어 있는 동안 한국은 끊임없는 도전 정신으로 선진 야구를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갈증을 느끼며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것이 국내 프로야구 선수 5백여 명, 고교야구 57개 팀의 척박한 야구 저변에서 한국 야구가 세계를 호령할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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