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 인수 뒤에‘밀약’ 있었나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9.04.2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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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의 한국항공우주산업 인수설 확산…오래전부터 정부와의 ‘교감’ 의심 받아

▲ 지난 1월5일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신년인사회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월22일 아랍에미리트연합국(UAE)의 수도 아부다비에 위치한 한 호텔의 객실 안. 김형오 국회의장이 착잡하고 다급한 심경으로 편지를 써내려갔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우리나라와 이탈리아가 경합 중인 고등훈련기 도입 사업의 진행 경과에 관하여 그동안 대통령님께 보고된 바와는 달리 현재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후략)’

당시 중동 순방길에 오른 김의장은 1월21일 UAE의 실질적 통치자로 알려진 모하메드 왕세자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개발한 국산 고등훈련기 T-50의 UAE 수출 추진 사업 경과에 대해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모하메드 왕세자는 “지금까지 9개월 동안을 기다렸으나 한국측에서 기술 이전에 관해 아무런 제안이 없었다”라며 불만을 제기했다.

2월20일 국회 국방위원회. 변무근 신임 방위사업청장(방사청)을 출석시킨 자리에서 국회의원들은 “낙관적으로 봤던 T-50 수출에 어두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방사청측은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2월26일 아부다비의 아이덱스 방산전시회장. UAE는 차세대 훈련기로 이탈리아의 M-346을 선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KAI(카이)측은 크게 낙담했다. 지난 4년간 공들여 사활을 걸었던 대규모 사업이 결국, 실패로 끝난 것이다. 곧 민영화 움직임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소문이 회사를 떠돌았다.

그로부터 정확히 2주 후인 3월12일 신라호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대한항공은 이미 방위 산업 부문 사업을 하고 있어 국가 산업에서 KAI(카이)의 중요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좋은 제안이 온다면 카이의 대주주인 두산 쪽과 만날 의사가 있다”라고 밝혔다. 카이의 지분을 인수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3월27일 두산 주총에서 ㈜두산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된 박용현 두산건설 회장은 “카이 지분 매각에 관심 있다”라고 화답하듯이 밝혔다.

한진그룹 ‘10년 절치부심’에 대한 보상 ‘시나리오’?

4월15일 카이의 최대 주주인 산업은행측은 “카이 매각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매각 일정 등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결정한 바 없다”라고 밝혔다. 그동안 물밑에서 나돌던 지분 매각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카이 매각을 둘러싼 카운트다운이 비로소 시작된 셈이다.

재계 주변에서 지난 1월부터 끊임없이 나돌던 대한항공의 카이 인수설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2의 롯데월드’ 사태가 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명박 정부의 친기업 정책이 너무 지나치다”라는 목소리가 여당 주변에서도 나오고 있다. 카이 민영화 움직임을 둘러싸고, 정계와 재계 주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현 정부와 한진그룹의 교감설이 떠돌았던 것이 사실이다.

재계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이를 한진그룹의 ‘10년 절치부심’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이른바 좌파 정권이라고 불리는 지난 10년 동안 가장 설움을 곱씹었던 유력 재벌 기업 중의 하나가 한진그룹이었다. 김대중 정권 초기만 해도 한진은 재계 서열 6위였다. 그런 한진이 지금은 10위권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하는 상황이다. 그보다 더 뼈아픈 것은 라이벌 기업이라 할 수 있는 금호아시아나에조차 밀린 것이다. 한진은 지난 좌파 정권에서 미움을 받아 상당한 불이익을 보았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라고 전했다.

한진그룹이 김대중 정권과 불편했던 것은 재계에서는 주지의 사실이다. 1999년 4월20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대한항공에 대한 고강도 제재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민간 기업에 대한 청와대의 이같은 조치는 극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일각에서는 호남 기업인 금호를 키우기 위한 전략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국산 고등훈련기 수출 실패 미리 알고 ‘접촉’했다는 증언도

▲ 경남 사천 한국항공우주산업을 방문한 김학송 국회 국방위원장과 위원들이 국산 고등훈련기 T-50(위) 생산 라인을 시찰하고 있다(아래).

박정희 정권부터 김영삼 정권까지 역대 정권과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던 한진으로서는 처음 맞는 시련이었다. 여기에는 고 조중훈 창업주 일가가 보인 ‘반DJ’ 성향의 행보 또한 일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한진그룹은 김대중 정권에서 대대적인 특별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3개월 동안 국세청 조사 인력만 2백여 명 이상이 동원될 정도였다. 당시 대한항공측은 “세무조사 이후 노선권 배분 차별 등 정부로부터 눈에 띄는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다”라고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던 대한항공의 항공 산업 분야 역시 크게 위축되었다. 여객운송 사업 분야에서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아시아나항공의 거센 도전을 받았다. 항공 제작 사업 분야는 그나마 1999년 설립된 카이의 상대가 되지도 못했다. 카이는 당시 삼성과 현대, 대우(이후 두산이 인수) 등 3대 재벌그룹이 갖고 있던 항공 부문 사업을 정부가 주도해서 빅딜이라는 이름으로 통폐합해 세워진 회사였다. 3사가 각각 20.54%씩의 지분을 갖고, 산업은행이 30.54%의 지분을 소유하는 ‘반(半) 국영기업’ 성격으로 출범했다. 항공 제작 사업에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  

한진그룹의 이런 피해의식은 노무현 정권에까지 이어졌다. 대한항공은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카이 인수 의사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찰의 대선 자금 수사에 휘말려들면서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당시 한진그룹의 조양호 회장은 한나라당에 불법 대선 자금 20억원을 제공한 혐의로 2004년 4월 기소되었다. 한진은 2005년에 다시 한 번 카이 인수 의사를 표명했으나, 노무현 정권은 이를 외면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진그룹과 조회장의 행보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조회장은 지난해 4월과 9월 두 차례 청와대에서 열린 ‘투자 활성화 민관합동 회의’에 모두 참석했다. 이대통령의 4월 미국·일본 방문과 9월 러시아 방문, 11월 남미 순방길에도 조회장은 항상 동행했다. 또, 6월의 핀란드 총리 방한과 12월 요르단 국왕 방한 때에도 청와대 공식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전경련 회장단 등 대기업 회장단 만남에서도 이대통령과 자주 자리를 함께했다. 지난 3월2일 대한항공 창사 40주년 기념식에서는 이대통령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현 정부와 한진그룹 간의 친분을 말할 때 거론되는 인사가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이다. 현 정부의 외교안보 분야 핵심 실세로 알려진 김비서관은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셋째 사위이다. 조 전 부회장은 창업주인 형 조중훈 전 회장과 더불어 한진그룹의 창업 산파역을 담당했던 동업자이다. 군 출신인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청와대와 한진측은 김비서관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혼맥 관계가 언급되는 것에 굉장히 불편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정부는 ‘실용’을 내세우고 있다. 모든 것을 시장 논리로 접근하겠다는 것이다. 방만하거나 경쟁력 없이 안주하는 공기업은 과감히 민영화하겠다는 입장이다. 그 안에 카이도 포함되어 있다. 이대통령도 카이의 민영화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거기에 이번 T-50 수출 실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카이의 한 관계자는 “T-50 수출 무산이 마치 민영화의 징벌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물론 제대로 수출을 성사시키지 못한 우리 잘못도 인정한다. 하지만 항공기 등 방산 분야 수출 사업이라고 하는 것은 기업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 우리와 경쟁한 이탈리아만 해도 정부가 전면에 나섰다. 미국이나 일본도 정부 차원에서 나서고 대통령과 총리·장관이 직접 세일스한다. 우리는 그런 지원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라고 억울해했다.

▲ 경남 사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사내 운동장에서 ‘대한항공의 KAI 지분 인수 저지 보고대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카이측 “사실상 대한항공이 인수사로 내정된 것으로 안다”

노무현 정권에서 국방 정책 분야에 깊이 관여했던 ㄱ씨도 비슷한 의혹을 제기했다. “국방부 등에서는 이미 T-50 수출이 어렵다는 것을 미리 직감한 듯한 징후가 많이 노출된다. 한진측이 이미 3월 초에 지식경제부장관과 국회 지식경제위원장실을 접촉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이상하리만큼 뭔가 시나리오대로 착착 진행되는 듯한 느낌이다”라고 밝혔다.

카이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사실상 카이 인수 기업으로 이미 대한항공이 내정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민영화 자체에도 반대하지만 설사 불가피하게 민영화를 한다 하더라도 대한항공은 절대 불가하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카이와 대한항공 제작 부문의 지난해 경영 실적만 비교해봐도 이는 명백히 드러난다. 지난해 우리 매출이 총 9천100여 억원인 데 비해, 대한항공은 3천7백여 억원에 불과했다. 영업이익도 우리가 3배가량 많고, 인력도 약 1천여 명 이상 더 많다. 연구 개발 인력은 우리가 대한항공에 비해 무려 8배가 더 많다. 부채 비율도 우리는 1백32.1%인데 반해, 대한항공은 4백62.0%에 이른다. 이처럼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도 규모가 더 작고 부실한 대한항공이 우리를 인수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주장했다.

대한항공의 한 관계자는 “카이는 정부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밀어주다시피한 항공 제작 전문 업체이고, 우리는 (항공 제작이) 회사 내 하나의 사업 분야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의 지난해 단순 수치 비교는 무의미하다”라고 반박한다. 그는 “우리는 그동안 전투기 제작 등 방산분야에서 소외됐을 뿐, 민항기 제작 사업과 투자는 꾸준히 해왔다. 물론 2000년대 들어서도 차세대 전투기(KFP) 사업과 KT-1 기본훈련기 개발에 참여하는 등 방산 분야의 노하우도 대단히 축적돼 있다. 또한 동아시아 최대의 군용기 정비기지 시설과 함께, 한국형 우주발사체 및 액체 로켓 엔진 개발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현재 국내 업체 중 항공 분야에서 우리 회사만큼 그런 노하우가 축적돼 있는 회사가 또 어디 있나. 만약 카이의 민영화가 불가피하다면 과연 국내 어느 기업이 여기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맞다고 보는가”라고 반문했다.  

ㄱ씨는 “카이 매각설이 이상한 방향으로 왜곡되고 있는 느낌이다. 마치 카이의 ‘밥그릇 지키기 싸움’으로, 또 대한항공을 비롯한 몇몇 기업들의 ‘이전투구’ 양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사태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항공기 판매는 대통령의 세일스 품목이다. 민간 기업이 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미국이 우리에게 F-15를 팔 때 부시 대통령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항공기 완제 업체가 이렇게 기업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것이 우리 국익과 국가 브랜드 이미지에 얼마나 심대한 타격을 미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라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산업연구원의 안영수 연구위원은 “카이와 대한항공의 대결 구도보다는 우리 항공 산업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봐야 한다. 최근 10년간 세계 항공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에 쫓아가지 못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카이가 수출보다는 내수 산업 위주로만 안주했다는 일부 비판적 시각도 분명히 존재한다. 현재 국내 항공 제작 부분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카이의 체질을 좀더 경쟁력 있게 바꿀 필요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카이를 인수하려면 이에 대한 뚜렷한 비전 제시가 있어야 한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전문가들의 입장도 다양하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기업 논리보다는 방위 산업 분야의 경쟁력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런 측면에서도 벌써부터 지나치게 특정 기업이 부각되는 듯한 모양새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 지난 3월2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2019 경영 목표’를 발표하고 있다.

“창립 40주년이 되는 올해를 대한항공이 새롭게 출발하는 원년으로 삼고자 한다. 오는 2019년에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선도 항공사로서 세계 10위 안에 진입할 것이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지난 3월2일 대한항공 창립 40주년 기념식에서 제시한 비전이다. 최근 들어 한진그룹의 거침없는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국내 최대 항공 제작사인 ‘카이’를 인수해서 명실 공히 국내 항공 산업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야망을 감추지 않는다. 대한항공이 현 정부와의 정경유착설까지 불거질 정도로 ‘뜨거운 감자’로 통하는 카이의 인수에 그렇게 적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분석이다.

여객 사업 부분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한항공의 적자가 커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해 적자만 1조9천억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현재 대한항공의 항공 제작 사업 부문의 부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도 깔려 있다. 대한항공의 항공 제작 사업은 지난해 전체 매출이 3천7백여 억원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런 두 가지 고민을 카이의 인수로 인해 한꺼번에 풀어 돌파구를 마련해볼 수 있다는 전략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최근 그룹 내에서 가시화되고 있는 후계 구도와 관련한 문제도 거론된다. 조회장의 자녀 1남2녀 중 외아들인 조원태 한진그룹 상무(34)와 장녀인 조현아 대한항공 상무(36)가 주목받고 있다. 조원태 상무는 올해부터 대한항공 여객사업본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한진의 등기이사이며, 계열사인 IT업체 유니컨버스의 대표도 겸하고 있다. 

조현아 상무는 대한항공 기내식사업본부장을 맡으며, 지난 3월에는 계열사인 칼호텔네트워크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한진그룹 주변에서는 “조회장은 장녀인 조현아 상무와 조현태 상무를 함께 경영 수업을 시키고 있다”라는 얘기가 많다. 일각에서는 “대한항공이 기존의 여객 사업 부문 외에 항공 제작 사업을 키워서 결국, 두 개의 분야로 따로 가려는 것이 아닌가”라며 후계 구도와 관련해서 유추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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