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반미 연대’ 풀릴까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9.04.2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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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주미 대사 곧 임명”…쿠바도 “미국과 모든 것 논의할 용의”

▲ 미주기구(OAS) 정상회담 개회식에 참석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이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AP

지난 4월18일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포트 오브 스페인에서 열린 제5차 미주국가회의 정상회의에서 세계의 이목을 끌 만한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33명의 다른 나라 대통령들의 앞을 한참 걸어가더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 이르자 불쑥 손을 내밀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느닷없는 차베스의 접근에 한순간 망연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의 손을 내밀면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베스는 준비해간 책 한 권을 오바마에게 건넸다. 그리고 곧장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불과 2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TV 카메라들은 일제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보냈다.

 차베스가 오바마에게 건넨 책은 우루과이의 저술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쓴 <라틴 아메리카의 잘려진 핏줄: 5세기에 걸친 어느 대륙의 약탈>이었다. 이 책은 미국과 유럽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행한 제국주의 침략 사례를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을 비난하는 내용들이 많아 외교적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한 한국 대통령이 일본 총리에게 일제 강점 36년의 역사책이라든가 정신대 사례 모음집을 건네는 것에 비유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차베스가 결코 악의를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베스는 전날 정상회의장 입구에서 입장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오바마를 찾아가 악수를 건네기도 했다. 차베스는 당시 “친구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고, 오바마는 그의 손을 잡는 것으로 화답했다.

연 이틀간 해프닝과 같은 두 정상의 조우로 미국과 베네수엘라 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전세계에 전해졌다. 세계는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중동을 포함한 지구상 어느 나라들보다 미국에 강력한 비난을 퍼부으며 반미주의의 선봉에 섰던 차베스 대통령이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차베스, 갑자기 오바마에 다가가 책 건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차베스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악마’라고 불렀고, 오바마에게는 ‘무식쟁이(ignoramus)’라고 비아냥댔다. 그는 이번 미주 정상회의 직전 미국이 ‘악한’으로 여기고 있는 수단의 오마르 알 바시르 및 이란의 모하메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과 정상회의를 가짐으로써 오바마의 심기를 건드린 바 있다.

 차베스는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오바마를 수행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을 만나 “곧바로 주미 대사를 임명하겠다”라고 밝혔다. 차베스는 지난해 9월 볼리비아와 함께 주미 대사를 소환했다. 미국이 이에 대응해 자국 대사를 소환함으로써 양국의 외교관계는 사실상 단절되었다.

 차베스의 돌출 행동은 미국 플로리다 주에 몰려 사는 베네수엘라계 이민자들에게는 10년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차베스 등장 이후 미국과 베네수엘라 간의 관계가 불편해져 마음고생을 하던 이들은 차베스와 오바마의 20초 만남을 전한 동영상을 수십 번 틀고 또 틀면서 안도에 젖고 희망에 부풀었다.

 차베스는 쿠바의 카스트로 형제와 대조적이다. 이미 대통령직을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인계했지만 아직 쿠바의 실권자로 건재한 피델 카스트로는 4월 초 아바나를 방문한 미국 의회 흑인 의원단에게 간곡한 어조로 “우리가 오바마 대통령을 위해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를 말해달라”라고 말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오바마의 도움을 받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라울 카스트로 대통령도 지난 4월15일 오바마 대통령이 대쿠바 관계 개선 방침을 재확인하며 쿠바 이민의 본국 방문과 송금 허용 등 규제 해제 조치를 발표하자 고무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우리는 미국과 인권, 언론 자유, 정치범 등 모든 것(everything)을 기꺼이 논의할 것이다. 미국이 원하는 모든 것을…”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것(everything)이라는 표현을 4차례나 반복했다. 또, 그는 “쿠바 정부도 잘못한 것이 있을 수 있다”라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하기도 했다. 지난 47년간의 대쿠바 무역 규제 해제를 바라는 카스트로 형제의 소망을 그만큼 절실하게 전하고자 한 것이다. 그동안 필사적으로 미국에 대항해온 쿠바 정부로서는 구걸에 가까운 추파나 다름없다. 라울 카스트로는 ‘쿠바의 주권과 쿠바 국민의 자주권에 대해 어떤 침해도 없어야 한다’라는 조건을 붙이기는 했으나 강도는 그리 세지 않았다.

 차베스와 카스트로의 이런 태도 변화를 두고 미국 내 남미 및 쿠바 전문가들은 두 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다. ‘커다란 지진’과 ‘갈라진 자그마한 틈’으로 묘사된 놀라움과 시큰둥함이다. 그러나 두 나라와 미국의 관계가 달라지고 있다는 데에서만은 일치하고 있다.

 반미 선봉 국가들이 달라지게 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강조해온 ‘새로운 길’에 대한 응답이다. 이번 미주국가회의에 참가한 각국 정상들은 회의장 분위기가 5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데에 놀라고 있다. 올해도 미국이 앞장서 쿠바의 참가를 거부한 조치에 대해 좌익 친카스트로 정상들의 공격이 있었으나 대세를 좌우하지는 못했다. 미국은 “국민에 의한 정당한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국가 정상의 회담 참가에 반대한다”라고 천명함으로써 쿠바의 참가를 막았다. 니카라과의 오르테가 대통령은 쿠바가 불참한 미주국가회의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고 미국의 오랜 대쿠바 무역 제재를 비난하는 연설을 50분간에 걸쳐 했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국민에 의해 선출된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암살 기도를 했다고 미국을 맹비난했다. 그러나 오르테가와 모랄레스의 연설은 오바마의 정중한 유감 표명으로 힘을 얻지 못했다.

미국 내 보수파들은 오바마의 유화 정책 맹비난

 오바마 대통령은 “많은 나라 정상들이 지적한 미국의 잘못이 본인이 취임한 후인 지난 3개월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데 대해 안도한다. 미국의 지난 정책 실수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말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 국가 정상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는 또 “미국은 정당한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외국 정부 수반에 대해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쿠바를 비롯한 여러 라틴 아메리카와 함께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오바마는 “미국을 무조건 나쁜 나라로 비난하는 것도 삼가자”라고 호소했다.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길은 이같은 오바마의 유감 표명과 차베스의 즉흥적인 돌발 행동 그리고 쿠바의 읍소형 메시지로 탄탄해지고 있는 셈이다.

 오바마의 대쿠바 및 대베네수엘라 유화 정책이 미국 내 쿠바 난민과 베네수엘라 이민자들에게 기대를 안겨주었지만 오바마는 당장 국내 보수파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다.

 CNN의 정치분석가 데이비드 거건은 “오바마 대통령이 차베스와 어쩔 수 없이 악수는 했더라도 웃지는 말았어야 한다”라고 꼬집었다. 공화당 뉴트 깅그리치 전 연방 하원의장은 “라틴 아메리카에 있는 미국의 적국들은 오바마가 차베스와 악수한 것을 놓고 미국이 독재자 차베스를 합법적으로 승인했다고 선전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같은 공화당의 존 엔사인 상원의원(네바다 주)은 “차베스는 잔혹한 독재자이자 인권 침해자이다. 오바마는 차베스와의 관계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라고 경고했다. 크리스천 모닝포스트는 “오바마의 대외 정책은 이상에 치우쳐 현실을 외면한 천진난만한 수준이다”라고 폄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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