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군대 살 뺀다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9.05.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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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린, 군부 반발에도 10만 병력 감축·편제 개편 밀어붙여

▲ 2차 세계대전 승전 64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한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푸틴 러시아 총리.

러시아군은 지난 5월9일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서 2차 대전 승리를 자축하는 성대한 열병식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9천명의 병력이 참가한 가운데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그러나 화려한 퍼레이드에 가려진 군인들의 표정은 침통했다. 크렘린이 단행하려는 군부 개혁 때문이다. 개혁의 초점은 스탈린 시대에 만들어진 군 조직을 21세기의 현대전에 맞게 개편하는 것이다. 개혁의 계기가 된 것은 지난해 8월 그루지야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짧은 기간에 러시아의 승리로 끝났으나 러시아군이 안고 있는 많은 약점을 노출했다.

군 개편 작업은 그루지야 전쟁 직후에 예정되었으나 군부의 반발로 지연되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군 내부 기득권층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고위 장성과 정보 책임자들을 다수 해임했다. 군부는 개혁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러시아군은 크렘린에 불만이 많다. 이들의 가슴속에는 냉전 시대 한때 병력이 4백만명에 육박했던 강대국 시절의 향수가 남아 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급여는 삭감되고 군 위상은 추락했다. 이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다. 이제 개혁까지 단행되면 병력은 100만명으로 줄어든다. 10만명이 옷을 벗는다는 얘기이다. 군을 떠나는 사람들은 갈 곳도 없고 살 집도 없다. 군인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2차 대전 후 최대 규모의 군부 개혁, 그것도 축소 지향적 개혁이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이루어지는지 이유는 분명치 않다. 세계적인 경제난으로 인해 과대한 군 조직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이는 지난 3월 러시아를 강력한 군대로 재무장하는 동시에 특히 핵 저지력을 업그레이드하겠다고 선언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더구나 이번 개혁은 군 내부는 물론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 가운데 추진되는 바람에 그 진의를 놓고 말이 많다. 러시아가 때를 잘못 맞춘 채 실책을 범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고, 미국의 군사 전략 변경에 대응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일부 러시아 전문가들은 이처럼 급격한 개혁이 사회적 소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최고 사령관인 대통령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저항으로까지 확산될 것 같지는 않다.  

개혁의 실제적 목표는 현재 1백10만명인 병력을 10만명 줄이는 것이다. 특히 장교는 절반이 준 15만명으로 감축한다. 불만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떤 기준으로 감원하며, 형평성이 보장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러시아군은 현재 수직 조직으로 되어 있다. 이 편제는 개편을 통해 기동성이 크고 전투력이 향상된 3개 수평 축으로 대체된다. 또한, 재래식 전쟁에 맞춰진 군대를 현대전에 대응할 수 있는 태세로 경량화·기동화하는 것이 요체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사시 작전명령 결정 시간을 단축하고 효율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혁이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가장 큰 문제는 10만명의 군인들이 빈손으로 군복을 벗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정부는 아파트도 주고 일자리도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감원의 1차 대상은 10년 미만 복무자들이다. 10년 내지 20년 이상 근무한 병사들에게는 스스로 사임하든가 극동 지역으로의 좌천 중 하나를 택일하라고 통보했다. 군부의 동요와 관련해 러시아 국방부는 서방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거부했다. 1990년대 혼란기에 감원된 군인들은 용병으로 변신해 옛 소련과 유고 등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이번에 퇴출당하는 군인들에게는 그런 기회마저 없다.

개혁으로 추방되는 5만명의 장교들이 큰 골칫거리이다. 정부는 이들을 달콤한 말로 무마하고 있으나 분노와 배신의 감정이 너무 깊다. 이들이 최악의 경우 범죄 조직에 가담할지도 모른다는 극단적 전망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나톨리 세르듀코프 국방장관은 지난 3월 연례 국방회의 연설에서 개혁의 목적은 군 현대화일 뿐 다른 의도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그러나 실제 진행되는 개혁의 모습과는 맞지 않는다. 러시아군이 보유한 현대 무기는 전체 군 장비의 10% 미만이다. 현대 무기 비율은 2015년까지 30%, 2020년까지 70%로 높일 예정이다. 그렇다면 군 현대화를 위한 예산을 증액할 것이지 왜 병력을 감축하느냐는 것이 군부의 불만이다. 정부로서는 유가 폭락으로 세수가 줄어 예산 증액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아파트·일자리 주겠다는 약속 거의 안 믿어

러시아군은 그루지야 전쟁에서 많은 취약성을 드러냈다. 통신 장비는 불통이고, 부대 간 협력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첩보도 엉터리였고 탄약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군은 인구 4백50만명의 약소국 그루지야 전쟁에서 간신히 이겼다. 이보다 막강한 적과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현재의 편제와 방어 태세로는 승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장교는 그루지야보다 더 센 적이 나타난다면 결과는 치욕적일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핵을 사용할 수는 없고, 동시에 핵을 사용하지 않고는 적을 제압할 수 없는 현실이 러시아군의 딜레마이다. 이 점을 감안하면 개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과 타이밍에 문제가 있다. 

일부 분석가들은 러시아군의 축소 개편이 미군의 개편 및 나토의 위상 변화와 관련되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나토를 더 이상 안보상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겉으로는 그루지야 전쟁 당시 나토의 무력 시위와 폴란드와 체코에 건설되는 미사일방어망(MD)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는 그러나 국내 여론을 의식한 외교적 제스처이고 옛 위성국들이 나토에 가입한 상황에서 과거처럼 나토를 주적으로 삼는 병력 규모는 불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냉전 시절 국방 예산의 40%가 군부 요인들의 치부 수단으로 남용된 과거를 알고 있는 크렘린 지도부가 고육지책으로 제 살을 깎는 칼을 빼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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