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칙’ 어기고 대처 안이했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9.06.0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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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 경호 실패, 왜 일어났나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경위를 수사 중인 경찰이 6월2일 경남 김해 봉화산 부엉이바위 아래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현장 검증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는 국가 원수의 절대 안전을 보장하는 충성스러운 대통령 경호원이다.” 대통령 경호원들이 생명처럼 여긴다는 ‘경호원들의 다짐’이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하면서 이런 다짐이 무색해졌다.
노 전 대통령을 경호하던 경호원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다. 경호 경력 10년이 넘은 베테랑 경호원, 그것도 경호과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경호 간부가 그랬다. 역사의 증언자인 그는 당시의 상황까지 조작했다. 노 전 대통령의 사저 경호팀도 여기에 조직적으로 가담했다. 경호 실패를 은폐하기 위해 서거 시간대 등을 조작한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경호원들의 행동 어디에서도 충성심과 희생정신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의롭고 정직하게 행동하고, 명예를 지키고 품위를 유지한다’라는 행동 강령은 구호에 불과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은 경호원들에게는 돌이키기 싫은 악몽이다. ‘경호 수칙’만 제대로 지켰어도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명예를 중시하는 경호처의 명성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경호원 개개인의 충성심과 신뢰도에도 상처가 났다. 전직 대통령의 경호가 얼마나 허술한가를 보여준 일이기도 하다. 향후 경호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경호처장 경질, 봉하마을 사저 경호팀의 문책, 전직 대통령 경호 시스템 변화 등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경호처 내부에서 엄청난 칼바람이 불 것으로 예상된다.

봉하마을에 3개팀 21명 파견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경호는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 전직 대통령이 퇴임한 후 7년간은 경호처가 경호를 맡고 7년 뒤에는 경찰로 이관된다. 노 전 대통령처럼 퇴임 후 사망하는 경우에는 경호 대상은 영부인으로 좁혀지고 경호 기간이 7년에서 2년으로 줄어든다. 권양숙 여사는 내년 2월25일까지 경호처의 경호를 받을 수 있다.

현재 경호처의 경호를 받는 전직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은 퇴임 후 7년이 지나 경찰청으로 넘어갔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내년 2월까지만 경호처의 경호를 받는다. 현행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는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전직 대통령에 대한 모든 예우가 박탈된다. 하지만 경호는 예외이다. 비리로 사법 처리되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경호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시사저널>이 취재한 바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저인 동교동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인 봉하마을에는 21명(3개팀)의 경호원이 파견되어 있다. 전체 지휘·통솔권은 경호부장(3급)이 독립적으로 행사하고 있고, 그 밑에 세 명의 과장(4급)이 팀장을 맡고 있다. 팀원들은 5~9급까지 다양하다. 경호원들의 신분은 특정직 공무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인 지난 1999년에 별정직에서 신분이 보장되는 특정직 공무원으로 변경했다. 이때까지 경호원들은 항상 신분 불안에 떨어야 했고, 그만큼 충성을 바쳐야 했다.

전직 대통령 경호팀은 순환 근무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1년에 두 번 있는 경호처 정기 인사 때 장기 근무자 순으로 교체된다. 근무 형태는 보통 주간·야간·당직 근무자로 나뉘는데 노 전 대통령과 봉화산에 올랐던 이 아무개 과장(45)은 당직 근무자였던 셈이다. 이번처럼 대통령을 혼자 수행할 경우에는 보통 팀장이 경호에 나서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경호원 혼자 수행’이 도마에 올랐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 경호원 출신들의 생각은 달랐다. 우선 경호원 숫자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경호실 고위직에 있었던 ㄱ씨는 “한 명이 수행했다는 것은 논란거리가 안 된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경호 기법과 인원이 달라진다. 경호원이 당시 상황을 자체 판단해서 결정할 문제이다. 노 전 대통령 사건에서 가장 큰  실수는 경호원이 대통령의 심부름을 따랐다는 것이다. 경호원은 비서가 아니다. 시선을 놓칠까 봐 대통령을 봐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이 경호원이다. 어떤 경우라도 심부름을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잘못되었다”라고 강조했다.

▲ 지난해 9월 대통령 경호처 소속 경호관들이 청와대 연무관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경호 시범을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 경호처에서 파견…‘기강 해이’ 지적도

또 다른 경호원 출신인 ㅇ씨는 전직 대통령 사저의 근무 기강을 문제 삼았다. 그는 “현직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 경호는 차이가 있다. 전직 대통령의 경우 경호원들의 긴장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받는 등 심리 상태가 아주 불안했다. 경호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런 심리 상태까지 파악하고 위험 요소들을 미리 제거해야만 했다. 너무 무사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허를 찔린 것이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경호처와 경호처에서 파견된 전직 대통령 경호팀은 겉으로는 ‘한 집안 두 집 살림’ 관계이다. 경호처에 소속되어 있으나 경호처의 직접 지휘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사생활을 중시하는 전직 대통령의 특수성 때문에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의 사생활이 어느 정도까지 보장되는지는 알 수 없다. 전직 대통령 경호팀은 매일 근무 일지를 쓴다. 여기에는 몇 시에 누가 방문했는지 등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근무 일지는 경호처에도 올라간다. 때문에 경호처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전직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훤하게 알 수 있다. ‘독립 원칙’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전직 대통령 경호팀은 경호처 소속이다. 부당한 명령이라고 해도 상급자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는 체계이다. 봉하마을 사저 경호팀이 노 전 대통령의 자살 시간 등을 조직적으로 은폐·조작하려고 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경호처가 사건 은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에 대해 경호처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 경호에 대한 모든 현장 지휘권은 사저에 파견된 경호팀의 전담 부장이 독립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경호처가 일일이 관여하지 않는다. 단, 해외 행사 등에 부장이 요청하면 장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근무 일지를 쓰고 있지만 사람 이름까지 자세하게 적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몇 시에 손님 몇 명 하는 식이다. 방문자는 (전직 대통령) 부속실과 경호팀 몇 명만 알고 있다. 사생활은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전직 대통령의 경호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경호 수칙을 무시한 경호원들의 기강 해이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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