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을 누가 왜 만들었을까
  • 김유미 (연극평론가) ()
  • 승인 2009.07.01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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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테 요지 페스티벌’ <다락방>, 독특한 상상력 돋보이는 재미있고 경쾌한 무대

▲ 사카테 요지가 직접 연출한 의 극 중 장면들. ⓒ아르코 예술극장 제공



아르코 예술극장의 2009년 상반기 야심찬 기획 공연이 ‘사카테 요지 페스티벌’이다. 사카테 요지의 대표작 두 편을 올리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인 <다락방>은 자신이 직접 연출하고, 두 번째 작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원제: 오뚜기가 자빠졌다)>는 김광보가 맡는다. 사카테 요지는 요미우리 문학상 등 유수한 상들을 받으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고 일본에서 활발하게 작품을 만들고 있는 작가 겸 연출가이다. 우리에게도 낯선 작가는 아니다. 지난해 김광보 연출의 <블라인드 터치>라는 작품으로 산울림에서 관객과 만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작품 <다락방>은 그 작품과 스타일이 다르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카테 요지의 작품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거리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다락방>이 더 경쾌하고 재미있다.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도 <다락방>에서 더 빛난다. <블라인드 터치>가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대중적이기 힘든 측면이 있었던 데 반해 <다락방>은 우리 관객의 감성에도 무리 없이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난해한 구석은 남는다. 흥미롭지만 해석이 안 되는 측면이 있어서 작품에 더 바싹 다가앉게 만든다.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학자와 예술가 사이에 분명 존재한다. 이 작품에서 문제 삼고 있는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따뜻하다. 학자라면 이러한 현상이 생겨난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겠지만 작가는 똑 부러진 해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관객을 그들의 세계로 안내하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전체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판단하게 한다. 그래도 관객은 작가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생각을 확인하고 그에 대해 관객이 동의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 부분에서 헷갈린다. 마지막 장면을 통해 작가의 입장을 짐작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성적 측면과 감성적 측면이 따로 작동하면 영 어렵게 다가올 수 있다.     

히키코모리에 대한 시선 따뜻해

이 작품의 주제와 개성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은 무대이다. 무대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사다리꼴 모양의 다락방이 전부이다. 좁은 무대가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작품은 다락방에서 사람이 자살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학교 기숙사에서 독방을 쓰는데도 작은 다락방을 들여놓고 그것을 침실처럼 사용하다 학생이 죽게 되고, 그 학생의 형이 동생의 자살을 이해하기 위해 다락방에 관심을 갖게 된다. 형의 관심은 ‘도대체 누가 이런 다락방을 고안했는가’이다. 고립된 삶을 살게 만든 다락방이 자살의 원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동의한 관객들은 누가 왜 다락방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대단한 비밀이 있는 것처럼 관심을 갖고 사건을 지켜보게 된다. 자살한 학생의 형이 형사처럼 사건에 접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추리물의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무대는 논리적이지 않다. 다락방에서 생활하고 싶어 하는 다양한 히키코모리의 유형을 횡적으로 보여주다가 형사들이 잠복 근무하는 장면에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무사 시대의 다락방을 재현함으로써 횡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히키코모리가 개인적 차원에서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개인적 차원의 다양한 히키코모리의 모습도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고릴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여자아이가 다락방에 숨은 이유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여자아이는 따돌림을 당했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건강하다. 피해의식 따위는 없으며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 아이의 당당한 태도는 오히려 그 아이보다 다른 아이들이 더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이는 그 아이를 찾아온 같은 반 친구나 담임 선생님과의 비교를 통해 잘 드러난다. 다락방 속의 여자아이는 외부 정상인들과의 관계를 오히려 역전시킨다. 다락방은 그 아이를 보호해주는 안전망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여기서는 확실히 다락방이 꼭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닌 것처럼 그려진다. 



이와 상반되게 매우 병적인 인물도 등장한다. 어린 여자아이를 납치해 긴 세월 동안 다락방에 숨겨두고 노리개로 삼는 인물이다. 그보다는 약하지만 세상과 소통하는 데 어려운 인물들도 다락방을 선호한다. 자신이 임신했다고 믿는 젊은 여자는 결벽증에 편집증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이런 인물들은 자연스럽게 죽음과 가까워진다. 그런데 작가가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도 균질하지 않다. 심각하기도 하고 경쾌하기도 하다.  

작품의 상상력 역시 횡적·종적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다락방 헌터라는 구원의 인물을 보면 현실과 초현실을 아우르기도 한다. 다락방 헌터는 다락방의 인물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부르면 달려온다는 인물이다. 그는 다른 등장 인물들과 섞여 등장해 관념적 존재를 실제처럼 관객이 인식하게 만든다. 좁은 공간에서 상상력은 이렇게 무한대로 질주한다. 방향도 속도도 따라잡기 힘들다. 그래도 이 놀이가 즐겁다. 작은 다락방이 너무 많은 곳으로 바뀌고 이동해 정신이 없지만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상상력만 있으면 모두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는 다시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 다락방을 만든 인물을 밝혀낸다. 그 과정이 생략된 채라서 결과가 다소 싱겁기는 하다. 그리고 여기서는 다락방만의 폐쇄된 공간이 전체 무대 속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다락방을 전체 맥락 속에 볼 수 있게 해준다. 작가는 다락방이 지닌 포괄적 의미를 부각시키면서 은둔자들이 그것을 깨닫게 하려고 사인을 보낸다. 은밀하게 판매되는 다락방이 아니라 원래의 다락방이 지녔던 미덕을 떠올리게 하려고. 이는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내밀한 공간으로서의 다락방이 지닌 긍정적 측면을 확장해 은둔자들이 고립의 시간을 너무 길게 가져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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