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복고’에는 좋았던 과거 있었다
  • 김원 (문화평론가) ()
  • 승인 2009.07.2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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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세태 비웃는 풍자와 패러디 되살아나

▲ 연출과 출연진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복고 열풍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드라마, 영화, 가요, 패션 등 대중문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과거의 트렌드를 다시 들춰보고 있고, 대중은 재가공된 추억거리를 소비한다. 패션 흐름은 1980년대로 역행한다. 챙 넓은 모자나 꽃무늬 원피스, 배기팬츠 등 중·장년층의 옛날 사진 속에나 나올 법한 의상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노래도 옛 노래가 귀에 들어온다. 지나갔지만 익숙한 것이 편안하게 받아들여진다. 새롭고 낯선 것은 불안감을 자극하는 탓이다. 그러다 보니 가요계는 리메이크 붐이 일고 있다. 아이돌그룹 빅뱅은 이문세가 부른 <붉은노을>을 힙합 버전으로 바꿔 부른다. 김경호와 박완규는 그룹 부활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리메이크했다. 섹시스타 손담비는 리메이크 곡은 아니지만 1980년대풍 댄스곡 <토요일 밤에>를 부른다. 손지창과 김민종은 더블루를 재결성하고 자신들의 과거 히트곡 <너만을 느끼며>를 부르며 가요계에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TV 드라마도 복고 열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드라마 저 드라마가 복고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복고가 곧 성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대중이 원하는 과거의 일면을 보여주면 성공하지만, 들추고 싶지 않은 과거를 보여주면 실패한다. 최근의 성공 사례는 MBC 드라마 <내조의 여왕>(극본 박지은, 연출 고동선·김민식)이다. 김남주는 <내조의 여왕>을 통해 각종 화제와 유행을 양산했다. 우선 ‘김남주 물결 웨이브’로 거리를 온통 복고 헤어로 장식하고, 스카프 한 장으로 다양한 스타일을 연출하기도 했다. 극 중 김남주가 입었던 의상들은 배역 이름을 딴 ‘천지애 스타일’로 불리며 3040 여성들의 패션에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이 패션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촌티’로 평가 절하되던, 말 그대로 복고풍이다. 원색의 원피스와 잔뜩 부풀린 헤어스타일, 촌스러운 듯한 1970년대식 핑크 립스틱까지 온통 과거를 연상시키는 것들 일색이다.

이 드라마는 방영 초기에 <꽃보다 남자> 같은 꽃미남 학원물에 주부 시청자를 다 빼앗기고 고전을 면치 못했다. 주부들은 ‘내조’ 같은 전통적 개념을 끌어들여, ‘지지리 궁상’인 자신의 일상을 드라마로 보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좋았던’ 시절의 미모는 물론 정서까지 그대로 간직한 천지애는 그 모든 현실의 어려움을 유연하게 받아넘긴다. 남편의 출세를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진짜 현실적인 내조의 ‘여왕’들은 비웃음을 산다는 설정도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여왕’이 바란 내조의 목표 또한 남편이 정사원으로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다. 꿈이 참 소박하다. 천지애의 매력은 그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긍정의 힘이었다.

복고가 아무리 대세라고 해도, 사람들이 돌아보고 싶지 않은 감정과 과거사를 다루는 것은 실패로 직결된다. MBC가 한때 폐지했다가 부활시킨 주말 심야 드라마 시간대에 방송된  <2009 외인구단>의 경우, 1980년대 중반을 풍미했던 ‘경제 호황기’의 대표 문화상품인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원작으로 삼은 것이지만 시청자로부터 외면당했다. 이 작품은 강자와 약자를 대비시키면서 일견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통쾌한 반전을 노리는 듯하나, 기본 정서는 ‘강한 것이 아름답다’라는 힘에 대한 예찬이다. 마동탁의 초기 성공도, 정글의 법칙을 익힌 주인공 오혜성의 ‘복수’에 가까운 성공도 헛되고 덧없는 것이었다.

대중의 코드 벗어난 드라마 외면당해

▲ 더블루를 재결성한 손지창(왼쪽)과 김민종. ⓒ연합뉴스

후속 드라마 <친구, 우리들의 전설>의 경우에는 영화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직접 연출한 드라마로 현빈, 김민준 등 톱스타들이 포진했다. 검은 교복 차림의 학생이 가득한 강당에서 고등학교 밴드가 부르는 대학가요제 입상곡 <연극이 끝나고 난 뒤>와 룰러스케이트장에서 흘러나오는 옛 디스코 음악은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1980년대 고등학교를 완벽히 재현하고자 한 제작진의 노력이 아쉽게도 시청자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배경인 ‘1980~90년대 격동기’를 흐뭇하게 돌아볼 수 없는 현실 탓이다. 한국인은 외환위기를 겪으며 복고의 힘을 확실히 체험한 바 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이금림 작가의 TV 드라마 <은실이>(연출 성준기)는 추억과 향수의 결정판이었다. 사슴처럼 목이 길고 슬픈 눈빛을 한 열두 살 은실이(전혜진 분)는 전형적인 ‘누이’상이었다. 연이은 불행에도 꺾이지 않는 은실이의 꿋꿋함은 물론 등장인물들의 인정미와 ‘빨간 양말’ 성동일의 순정 등은 당시 시청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은실이’ 같은 누이상은 한국인에게는 각별하면서도 익숙한 이미지이다. 전쟁과 보릿고개 시절을 너끈히 견뎌낸 어린 누이들의 자화상은 1983년 드라마 <간난이>(극본 이재우, 연출 고석만)가 대표적이다. 1983년 8월29일 첫 방송된 이 드라마는 간난이 역의 김수양을 비롯해 동생 영구를 맡은 김수용의 천진난만하면서도 궁핍한 삶이 시청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았다. 

코미디의 복고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치와 세태를 비웃는 풍자와 패러디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정치 코미디는 탈권위주의를 내세웠던 지난 10년간 큰 힘을 쓰지 못했다. 권위적이고 서민과 거리두기에 거리낌이 없는 새 정부가 들어서며 개그맨들이 비틀고 재단할 소재거리가 많아졌다. 역시 유행은 돌고 돈다. 한쪽이 힘을 못 쓰면 다른 쪽이 힘을 받는다. 

복고 열풍은 어려운 경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어려울수록 과거로 돌아가려고 한다. 미래가 막막할 때 사람들은 추억과 향수에서 위안을 찾는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퇴행적으로 진행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에 대한 반성을 통해 현재의 자신을 냉정히 파악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내일을 준비할 힘은 현재를 파악하는 데서 나오고, 현재의 모습은 과거를 돌아보며 바로 세울 수 있다. 향수를 되살리는 문화상품들이 힘을 내고 있지만, 과거가 다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이 원하는 핵심에서 벗어나 있는 추억 상품은 외면받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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