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연구원 둘러싸고 ‘두뇌 싸움’
  • 노진섭 (no@sisapress.com)
  • 승인 2009.08.04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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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개원 앞두고 학자들 사이에 힘겨루기…초대 연구원장 놓고도 의견 분분

▲ 세계 각국이 뇌 연구를 미래 국가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 사진은 의료 영상장비 속에 있는 사람의 뇌 모형. ⓒ시사저널 박은숙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두뇌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싸움은 한국뇌연구원(가칭·이하 뇌 연구원)의 설립과 궤를 같이한다. 2013년 개원할 예정인 뇌 연구원은 뇌질환 치료법과 뇌기능 활용법을 개발하기 위한 국가 연구 기관이다. 국내외에서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석학들을 모아 명실 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뇌 연구원을 만든다는 것이 정부의 복안이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 사이에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다. 서로 잘 아는 사이라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특히 초대 연구원장과 연구원 부지 선정 문제를 놓고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뇌는 ‘작은 우주’라고 불릴 정도로 복잡하다. 그만큼 뇌에 대한 연구는 다른 신체 장기에 비해 늦게 시작되었다. 과거에는 해부학적인 연구에 그쳤다. 198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생리학적인 연구가 활발해졌다. 현재 뇌 연구는 세계적인 화두이다. 각국은 뇌 연구를 마지막 남은 미지의 과학 분야로 인식하고 있다. 이 분야를 국가 성장 동력으로까지 삼고 있다.

미국은 1990년에 ‘뇌의 10년(decade of the brain)’이라는 법안을 만들어 매년 70조원의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다.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뇌졸중연구소(NINDS), 국립신경질환연구소(NINDS), 국립신경과학연구소(PNI) 등을 통해 뇌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일본도 21세기를 ‘뇌의 세기(century of the brain)’로 규정하고 매년 8천억원을 쏟아 붓고 있다. 1997년에 설립된 이화학연구소(RIKEN) 산하에 뇌과학연구소(BSI) 등 도쿄에만 여섯 개의 뇌과학 연구소가 있다. 중국이 설립한 신경과학연구소(SIN), 국립뇌연구소(ION) 등은 이미 뇌 연구 분야에서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영국·프랑스·독일·스위스·호주 등 선진국들도 자국의 뇌 연구 역량을 결집하고 있다.

정부 입장은 외국인 원장도 무방

한국에는 국가 뇌 연구소가 한 곳도 없다. 1998년 뇌연구촉진법을 제정하는 등 뇌 연구 중요성을 인식한 정부는 2007년에야 뇌 연구원을 만들기로 했다. 지난 6월 공청회를 열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 교육과학기술부는 2013년 개원을 목표로 정했다. 국내 뇌 연구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다. 뇌연구촉진법 제정 후 10년 동안은 연구 인력이 부족해서 뇌 연구원을 설립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또, 신경생물학 등 몇몇 분야에서는 외국에서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도 나오고 있다. 뇌 연구원을 설립해도 될 만한 토양이 갖춰진 셈이다. 뇌 연구원 설립에 대해 뇌 학자들은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뇌 연구에 큰 주춧돌이 될 것이다”라며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치매 등 노인성 질환과 사고로 인한 뇌질환을 치료하는 방법이 주요 연구 분야이다. 또, 인지 기능 컴퓨터나 로봇 개발도 큰 전환기를 맞게 된다.

뇌는 신체 기관이지만 뇌 연구는 의학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공학은 물론 심리학까지 방대한 학문이 결집해야 뇌 연구가 가능하다. 의학과 공학은 물론 다른 학문이 필요하다는 데에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누가 초대 연구원장을 맡고 어디에 연구원을 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지난해 한국뇌연구원 설립추진기획단장을 맡았던 서유헌 서울대 의대 교수(신경과학연구소장)는 “국내 사정에 밝으면서 국제적 감각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 정보기술(IT)과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 전문가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정부와의 관계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라며 외국인 원장은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서울대 생명과학부 김경진 교수는 “세계 최고의 연구원으로 발전시키려면 세계적인 명성을 갖춘 외국인 원장이 필요하다. 예컨대, 미국 신경과학회장을 지낸 사람이라면 대외적으로 한국의 뇌 연구 성과를 잘 알릴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계 미국인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만일 내국인 원장 체제가 되면 한국 뇌 연구 비전은 없다”라고 강조했다.

연구소 유치에 대구·대전·인천 뛰어들어

정부는 외국인 원장도 무방하다는 입장이다. 뇌 연구원 설립을 담당하고 있는 김기석 교육과학기술부 융합기술팀 사무관은 “원장 자리에 외국인 학자를 영입하는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태에서 원장을 고려하게 될 것이다. 뇌 연구원이 들어설 장소는 올해 말까지 최종 계획안을 확정한 후 평가위원회가 선정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뇌 연구원 부지 선정을 놓고도 학자들 사이에 대립각이 첨예하다. 뇌 연구소 유치에 적극적인 곳은 대구, 대전, 인천이다. 지자체는 산학연 컨소시엄을 구성해 뇌 연구소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대구시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경상북도, 포스텍, 포항시, 경북대, 영남대, 계명대 병원과 함께 유치전을 펴고 있다. 대구는 DGIST와 각 대학 병원 뇌의학연구센터가 연계하면 뇌 연구에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대전시는 KAIST, 서울아산병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과 함께 연구 인력이 풍부한 대덕 연구단지와의 연계성을 앞세우고 있다. 인천시는 서울대 의대, 가천의대,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국내 최고 뇌 연구소로 평가받는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와 국제공항이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를 맡고 있는 조장희 소장은 최근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향후 상황에 따라 대전에 있는 KASIT로 자리를 옮길 수 있음을 시사했다. 연구원 유치에 판도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은 “연구 인력이 밀집되어 있어야 한다. 뇌 연구에는 여러 분야의 연구 인력이 필요하다”라며 연구 인프라의 연계성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서유헌 서울대 의대 교수는 “부지마다 장단점이 있다. 뇌 연구원 장소로는 외국과 교류가 편리하고 정치적 지원을 받기 용이한 곳이 적합하다. 외국인 학자의 자녀를 위한 국제학교도 있어야 한다”라며 외국 학자의 접근성을 강조했다.

연구원 설립에 정치적인 입김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뇌 공학 선구자로 꼽히는 이수영 KAIST 뇌과학연구센터 교수는 “한국은 일일 생활권인데 장소가 문제인가. 장소보다 하루빨리 연구원을 개원해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라며 장소에 연연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한국 뇌 연구사에 전환기를 가져다줄 뇌 연구원 설립을 앞두고 정치적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은 의학계와 공학계의 현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를 두고 한 공무원의 지적이 따끔하다. “일부 학자는 이곳저곳 발을 걸쳐 놓고 있다. 학문보다 정치적 분위기에 휩쓸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시사저널 박은숙
세계적인 뇌 과학자인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은 반평생을 외국에서 교수로 재임하다 5년 전 귀국해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조소장은 주요 영상장비인 CT, PET, MRI를 모두 개발해 본 세계 유일의 과학자이다. 1975년 세계 처음으로 PET을 독자 개발했고, 최근에는 뇌 전용 7테슬라 MRI를 개발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의료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MRI는 3테슬라급 이하이다. 어느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은 14테슬라급 MRI 개발이 꿈이라는 조소장은 <시사저널>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한국 뇌 연구 경쟁력의 조건으로 연구 풍토 개혁과 전문성 확보를 꼽았다. 

뇌 연구원 설립과 관련해 간과하면 안 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뇌 연구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영하느냐가 중요하다. 한국 사람은 무엇이든지 백화점식을 좋아한다. 백화점식 뇌 연구로는 세계 1위가 될 수 없다. 전문성을 갖추어야 한다.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연구자의 연구 성과를 5년마다 심사하자는 제안이 있다.  

난센스이다. 좋은 경쟁 체제를 만들어 놓으면 연구 성과를 내놓지 못하는 학자는 자연 도태된다. 최고 학자를 모아놓고 내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정보기술(IT)과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이 접목된 융합 연구가 미래 뇌 연구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융합 연구를 새로운 시각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구식(舊式)이다. 학자가 연구하다 보면 전자현미경, MRI, 쥐 실험 등 여러 분야의 도움이 필요하다. 융합 연구는 자연스러운 학문 활동이다.

초대 뇌연구원장의 자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세계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바람직하다. 국제 사회에서 경쟁할 수 있는 뇌 연구원을 지향한다면 세계적인 인재를 아우를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 따라서 외국인 원장이 적합하다.

국내 실정에 어두운 외국인이 연구원 운영을 잘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있다.

그럴수록 외국인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감각에 맞추어 연구원의 기틀을 마련해야만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국 뇌 연구는 외국보다 10년 더 뒤처질 수 있다.

뇌연구원장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그 자리는 내가 모르는 분야이므로 욕심이 없다.

뇌 연구원에 합류할 의사는 있는가.

나는 뇌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뇌 영상 분야만 생각하고 있다. 이런 노력이 국내 뇌 연구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

일부 의학자는 조소장을 뇌 연구 분야의 주요 학자로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여러 번 겪은 경험이다. 나는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의학계는 물론 물리학계도 나를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뇌를 연구한 사람은 없다. 의학, 생물학, 심리학 등을 연구하다가 자연스럽게 뇌 연구로 옮겨가는 것이다.

연구원에 필요한 학자를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국내 학자들은 고생하고 천대받는 연구소보다 안정적이고 편한 대학을 선호한다. 뛰어난 인재가 대학에 몰려 있는 이유이다. 이런 환경에서 뇌 연구원에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우수한 연구자를 확보하려면 대학과 결합한 뇌 연구원이 필요하다. 연구자에게 교수 신분도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럴 경우, 국가 뇌 연구원이 일개 대학 부설연구소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만만치 않다.

 국내의 연구 풍토를 바꾸어야 한다. 장관이나 대학 총장이 연구소를 쥐락펴락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학자도 정신 차려야 한다. 대학은 교육보다 연구하는 곳이어야 한다. 외국 대학 교수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보다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연구도 하지 않으면서 교수직을 철밥통처럼 꿰차는 학자는 없어야 한다.

뇌 연구원 장소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세계적인 뇌 연구원이 목표라면 연구 인력이 집중된 곳이 유리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천보다는 다른 곳이 좋지 않겠는가. 

조소장이 KAIST로 자리를 옮길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과학은 게을리하면 발전하지 않는다. 7테슬라급 MRI에 이어 14테슬라급 MRI를 개발하고 싶다. 국제적으로도 경쟁하는 분야이다. 이런 연구에 대해 KAIST와 논의하고 있다. 또, 미래 뇌 연구에는 인재 양성이 숙제이다. 후학 양성을 위해 KAIST와 서울대가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기대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아 이길녀 가천길재단 회장과 조소장 사이에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관측도 있다.

성과가 좋지 않으면 KAIST가 나와 같이 연구하자고 하겠는가. 연구는 시간이다. 노벨상도 30년 연구 결과에 대한 결실이다. 연구 성과는 역사가 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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