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한계 함께 안고 진보 사회 기틀 닦다
  • 이경헌 (정치평론가·포스커뮤니케이션 대표) ()
  • 승인 2009.08.1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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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DJ 시대’에 대한 평가는 이제 역사가들의 몫이 되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한 첫 정부였던 DJ 정부는 ‘국민의 정부’라고도 불렸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로 ?

 

▲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대선 후보 시절 김종필·박태준 전 총리,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함께 대선 광고 촬영을 하며 활짝 웃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DJ 시대’에 대한 평가는 이제 역사가들의 몫이 되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한 첫 정부였던 DJ 정부는 ‘국민의 정부’라고도 불렸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로 혼란에 빠진, 악화된 남북 관계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제자리에 올려놓는 역사적인 책무를 훌륭하게 수행해 노무현 정권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주었다. 김대중 정부 5년의 의의와 업적을 정치·경제·남북 관계 분야로 나누어 진단해보았다.


1998년 2월25일, 제15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국회에서 열렸다. 주인공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이었다. 역사적인 정권 교체에 성공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도 그만큼 높았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취임사에서 정치 개혁에 대해 분명하게 약속했다. 다음은 취임사의 일부이다.

“무엇보다 정치 개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국민이 주인 대접을 받고 주인 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국정이 투명하게 되고 부정부패도 사라집니다. 저는 국민에 의한 정치와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를 국민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내겠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어떠한 정치 보복도 하지 않겠습니다.”

정치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국민 통합을 이루며 정치 보복을 단절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취임 초기부터 정치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기에는 정권의 통치 기반이 너무 취약했고, 국회에서의 의석도 과반을 점하지 못한 상태였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자신이 총재로 있는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 총재의 자유민주연합과 연립 정부를 출범시켰지만, 권력분점 정부(divided government)가 갖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독자적으로 정치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이미 역부족 상태였다.

결국, 김대중 정권의 취임 첫해인 1998년은 정치 개혁보다 정쟁이 먼저 시작된다. 원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한나라당이 김종필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처리를 장기간 거부하고, 소속 의원의 사법 처리를 막기 위한 ‘방탄 국회’를 단독 소집하면서 본격적인 여야 정쟁이 시작된 것이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동 여당은 한나라당 의원 빼내기를 통해 1998년 9월 인위적으로 원내 과반수를 확보하기에 이르렀고, 한나라당은 등원 거부로 맞서면서 정국은 파국의 정점에 이른다. 소수 여당이 권력이라는 무력을 통해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바꾼 첫 사례이다. 이에 정권에 강력히 저항하는 한나라당의 정치 공세로 인해 김대중 정부의 정치 개혁과 지역 갈등 해소 정책은 시동조차 걸지 못하고 취임 첫해를 마감한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이 8월18일 상도동계 인사들과 함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를 방문했다. ⓒ연합뉴스

 

정치 보복 근절 약속 지키고, 참여민주주의 기회 확대

여야 간의 극심한 정쟁은 1999년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공동 여당이 경제청문회를 강행하면서 한나라당은 영남권 장외 투쟁으로 맞섰고, 대통령 선거 자금 의혹 사건인 ‘세풍(稅風) 사건’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자 한나라당은 서상목 의원을 위한 방탄 국회를 잇달아 단독 소집하며 강경 대치 국면을 이어갔다.
그러나 유종근 전북지사 등 고관 집 절도 사건, 장관 부인 고급 옷 로비 사건, 검찰의 조폐공사 파업 유도 의혹 사건 등으로 정권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기 시작하면서 DJ와 여당이 정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동력은 급속히 약화된다. 전형적인 권력형 비리가 민심 이반을 가속화하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정치 개혁안의 일환으로 국회에 제출한 정당명부제와 중선거구제 입법안 등도 추진되지 못한 것이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DJ는 신당 창당 구상을 본격화한다. 불안정한 동거 체제인 ‘DJP 연정’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2000년 총선에서의 과반 의석을 통해 지역당의 한계를 뛰어넘고 독자적인 정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기도 했다.

이 구상은 1999년 7월 DJ의 광주 발언을 시작으로 가시화되었고 그해 11월25일,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를 겸하고 있던 DJ가 (가칭)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대회에 참석해서 ‘전 국민적 지지를 기반으로 한 개혁적 전국 정당 창당과 중선거구제로의 선거법 개정’ 등을 촉구하면서 공식화되었다.

2000년 1월20일, 김 전 대통령과 새정치국민회의는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본격적인 정치 실험에 돌입한다. 집권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으로써 서민·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중도 개혁적 전국 정당을 표방하며, 민주주의·시장 경제·생산적 복지의 3대 이념과 기업·금융·공공 부문·노사 개혁의 4대 개혁 과제를 제시하며 출범한 것이다.

새천년민주당은 이인영·임종석·우상호 등 386 세대 ‘젊은 피’를 수혈하는 한편, 당시 이인제 당무위원을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해 제16대 총선에 임하지만 유권자의 외면과 역대 최저 투표율(57.2%)로 인해 1백15석을 얻는 데 그쳤다. 자민련의 의석(17석)을 합하더라도 원내 과반수에 미달하게 되어 기본적인 국정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동력도 확보하지 못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주도한 신당 창당이라는 정치 실험과 지역 갈등 해소를 위한 정계 개편 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이다.

기존 정당의 1인 보스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 당시 주류였던 동교동계의 권력 독점을 방치한 점도 정치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김 전 대통령과 여당 수뇌부의 영입 인사 수혈에 대한 구시대적 인식도 정치 개혁의 한계를 누적시켰다. 차기를 예비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세력의 양성을 시도하지 못하고 영입 세력에게 권력의 보완재 역할만 강조한 것이다.

결국,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DJ와 여당 수뇌부는 정치 개혁 및 전국 정당을 구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잡는 데 실패했고, 이후 정동영·김근태 의원 등에게 정풍(整風) 운동의 빌미를 제공하면서 스스로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 임기 말 DJ 아들들의 비리 문제가 터져 나오면서 DJ가 여당을 중심으로 시도했던 정치 개혁안과 지역 갈등 해소 방안 등의 노력과 명분은 모두 상실된다.

정쟁·측근 비리로 발목 잡힌 정치 개혁의 꿈

하지만 DJ의 정치 개혁과 정치 실험의 실패와는 별개로 DJ의 신념에 기초한 민주적 가치들은 집권 기간 내내 정치·사회 영역에서 일관되게 실천되었다. 정치 보복 단절, 인권 보호, 사회적 약자 배려, 복지, 여성 정책 등에서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면서 국민 통합과 사회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다. 이는 차기 정권에서 국민의 참여민주주의가 본격화되는 토대로 작용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정적들을 용서하면서 정치 보복 근절에 대한 대국민 약속을 이행했고, 임기 중에 사형 집행을 단행하지 않으면서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지켰으며,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통해 국민의 인권을 국가가 직접 책임지는 시스템을 완결한 것도 중요한 업적으로 인정된다. 국가안전기획부를 대외정보 수집을 전담하는 국가정보원으로 개혁하고, 검찰의 성역 없는 수사를 보장했으며, 국민을 위한 권력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했다는 점도 민심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국민의 정부에서는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획기적인 지원을 통해 인터넷 등 쌍방향 소통 구조의 물질적 토대를 닦음으로써 민주주의의 본질인 참여 정치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과거 독일의 슈뢰더 총리가 “독일은 세계에서 한국 다음으로 정보화가 발달한 나라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국민의 정부는 정보통신 강국을 만들기 위해 최대한의 정책적 지원을 다했다.

쌍방향 소통의 주요 수단인 인터넷의 사용 환경이 혁신되면서 이후 인터넷은 대한민국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2002년 월드컵 광장 응원, 미선·효순 양 촛불 집회, 탄핵 반대 집회 등은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소통 수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언급한 참여 정치의 실현은 그 정치적 한계로 인해 좌초되었지만 최소한 다음 세대의 참여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는 통로는 충실히 개통한 셈이다.

2002년 1월, 새천년민주당이 당 쇄신안으로 내놓은 대통령 후보 국민 참여 경선 제도도 그 성과의 연장선에 있다, 한국 정치 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국민 참여 경선제는 당원 외에도 일반 국민이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음으로써, 지금까지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국민을 참여 정치와 소통의 장으로 불러 모았다. 일반 선거인단 참여를 신청한 국민이 무려 2백만명을 웃돌 정도로 이 제도는 국민과 언론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특히 당시 노무현 후보의 광주 경선 1위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며 동서 통합의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건국 이래 이어온 보수 독점 정치의 대체재로써 국민 참여형 소통 정치 실현이 이제 현실적으로 가능해졌음을 알렸다. 김대중 정권만큼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한계와 희망을 동시에, 그것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시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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