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는 독보적인 천재급 정치인”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08.2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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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본 ‘인간 김대중’ / “훌륭한 지도자의 3대 요건 갖춰”

▲ 2003년 1월3일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의 청와대 만찬. ⓒ연합뉴스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심정이다.” “이상하게 우리는 닮은 점이 많다.” “전생에 우리는 형제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 말들이다.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는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눈물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례적이었다. 한편으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을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YS)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면서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눈에 들었다. 이후 1988년 13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해 처음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2년여 후인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을 결행하면서 각자의 길을 가기는 했지만, 노 전 대통령에게 YS는 정치적 은인인 셈이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평가는 냉혹했다.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은 DJ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가 지난 1994년 출간한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새터) 등에 관련 내용이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YS는 ‘훌륭한 두목’, DJ는 ‘뛰어난 지도자’”

▲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정했다. ⓒ연합뉴스

“훌륭한 정치 지도자의 3대 요건으로 권력 장악 능력과 살림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꼽는다. 권력 장악 능력이라는 측면에서는 YS가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다. ‘3당 합당’이라는 전혀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여 집권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지도자로 부르는 데 동의할 수 없다. 그로 말미암아 청산해야 할 이 땅의 기회주의가 다시 때를 만났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훌륭한 두목’ ‘뛰어난 보스’ 등으로 평가했다. 정치적으로는 탁월하지만 ‘지도자’로는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반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도자’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오래전에 역사적 인물이 된 김구 선생을 제외하고 역대 대통령이나 현존하는 정치인 중에서 지도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점을 감안할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특별히 존경하는 것 같다.”

노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과 처음 대면한 것은 5공 청문회 직후인 1988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 그때였다. 의원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김 전 대통령은 “잘했다”라면서 악수를 청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제1 야당인 평민당의 총재였다. 노 전 대통령이 소속된 민주당과 사사건건 신경전을 벌일 때였다. 때문에 처음에는 김 전 대통령의 진실성에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DJ를 계속 접하면서 이같은 의구심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는 김 전 대통령의 첫인상은 자상함이었다. 진심으로 후배를 격려하는 어른의 자상함이었던 것이다.

이후 2년여가 흘렀다. 신민당(평민당의 후신)과 꼬마 민주당의 통합이 성사될 무렵 노 전 대통령은 DJ를 다시 만났다. 큰아들인 김홍일 전 의원의 반포 자택에서였다. 당시 그는 김 전 대통령을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입견과는 달리 자상하고 남의 얘기도 잘 들어주었다고 회고한다.

“그 만남부터 DJ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후 야권 통합으로 당을 같이하게 되면서 그가 부드럽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날수록 인상도 좋아졌고 호감도 갖게 되었다. 지난 1997년 대선 당시 김 전 대통령의 홍보팀은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는 말을 퍼뜨렸다. 선전을 위해 만들어낸 말이었다. 그러나 내가 본 DJ는 실제로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을 ‘참으로 아까운 분’으로 표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 전 대통령의 경우 지도자의 3대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 권력 장악 능력뿐 아니라 정치 철학까지도 탁월했다. 단지 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일화 한 토막.

▲ 지난 5월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울고 있다. ⓒ연합뉴스

“1987년 후보 단일화 타협 불발 이해 못 해”

“1992년 대선 때의 일이다. 민주당은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국민연합과의 정책 연합을 표방했다. 그러자 인공기 위에 김 전 대통령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나돌았다. 여당은 북한 방송을 인용하면서까지 민주당을 좌경 용공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당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간부들끼리 책임 공방이 벌어지면서 당내 갈등으로 번졌다. 하지만 당사자인 김 전 대통령의 반응은 달랐다. ‘왜들 변명하려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그 사람들 말이 옳으니까 정책 연합을 한 것이 아닌가. 선거전에 불리해진다고 해서 우리가 옳다고 주장했던 것까지 뒤엎어서는 안 된다.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라고 참모진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는 여론이 아무리 불리해도 어물쩍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고집이 아니었다. 힘없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 애정이 철학으로 가다듬어졌다.”

이날 일이 노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김영삼 전 대통령과 다르게 인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같은 성격이 정답은 아니었다. 그가 회고하는 김 전 대통령은 사람들의 말을 많이 가로막는 편이었다. 또, 입장이나 의견이 다를 경우 반드시 자신의 의견을 밝히면서 상대방을 설득하려 했다.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논리적으로 너무 완벽하고 자부심과 확신도 강해 다른 사람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논쟁을 해도 항상 이겨버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을 꺼내기를 어려워했다. 허점이 없는 그의 성격이 바로 최대의 허점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1987년 대선 당시 야권 통합에 실패한 DJ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지역주의의 폐해를 뼈아프게 겪었던 만큼 그때의 분열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을 것으로 풀이된다. 이같은 내용은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오마이뉴스)에 일부 언급되어 있다.

“김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은 1987년 대선에서 YS와 후보 단일화에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권당 노태우 후보에게) 이길 방법이 없으면 타협했어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당시 “노후보가 살기 위해 대통령을 밟으려 한다”라는 동교동계의 압박을 받았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진승현·정현준·이용호 게이트 등으로 야당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언론에서는 민주당 대선 주자들이 어떻게 DJ와 차별화할 것인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노 전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에 당선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 출범 후 대북 송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박지원 전 비서실장과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 ‘DJ맨’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노 전 대통령은 야당인 한나라당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특검을 수용했다. 이로 인해 동교동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측근들의 증언이나 노 전 대통령의 인터뷰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김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전혀 반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 전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참여정부 시절 법무부장관을 지낸 천정배 민주당 의원은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이 공개했던 국정원 도청 문건에 ‘노무현 최고위원이 대선 후보가 되면 제일 먼저 대통령을 짓밟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대선 당시 노후보가 DJ 노선에 가장 충실히 따랐다. 따라서 DJ를 들이받을 이유가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있던 지난 2007년 5월 청와대가 이례적으로 6년 전 민주당 대통령 예비후보 시절의 동영상을 공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노 전 대통령이 무주리조트에서 열린 ‘2001 노무현과 함께하는 사람들’ 행사에서 새천년민주당 당원과 대의원을 대상으로 연설하는 모습이었다. 당시 노대통령은 “민심이 대통령을 떠나고 있다. 3개의 보궐선거에서 모두 패배했다. 우리 당에서도 대통령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나는 의리 있는 지도자가 되겠다. 어렵다고, 민심에 도움이 된다고 대통령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은 안 된다. 김대중 대통령의 과업을 성공시켜 나가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다음은 그의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 수록된 내용이다.

“내가 그동안 부품소재 산업에 대해 많이 떠들었는데, 알고 보니 2001년 김 전 대통령이 법까지 다 만들어놓았다. 손댈 만한 것은 대개 한 번씩 손질을 해두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일어났던 시스템의 정리나 정책 시스템의 과정을 연구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다른 김 전 대통령의 면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의 천재가 아니라 정책에 있어서도 천재였다. 그 양반은 총체적인 능력이나 역량이 천재급 정치인이다.”

청와대에 남은 많은 DJ 자취에 놀라

노 전 대통령은 심지어 김 전 대통령을 독보적 존재라고까지 했다. 후임으로 청와대에 들어와서 김 전 대통령의 발자취를 보고 느꼈다는 것이다.

“퇴임 5년이 지난 지금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들이 있다. 내가 청와대에 들어와 보니 이 정부의 구석구석에 김 전 대통령의 발자취가 남아 있었다. 내가 창조적인 것이라고, 내가 처음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들어가 보면 김 전 대통령의 발자취가 있더란 말이다. 그런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상당히 많았다. 김 전 대통령은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때문에 이 책은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해외 인물로 링컨을 롤모델로 삼아 안목을 길렀다면, 국내 인물 가운데서는 김대중 대통령일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렇듯 두 사람은 대통령 선후배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재임 중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의 명예 회복과 평화통일에 앞장섰다. 노 전 대통령은 이같은 정책을 더욱 발전시켰다. 6·15 남북 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에서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이 연설은 결국 마지막 공개 연설이 되었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DJ는 정치적 동지인 노 전 대통령의 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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