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북송금 특검 반대했었다”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09.08.2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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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청와대 고위직 증언…DJ는 2002년 대선 경선 때 노후보 암묵적 지원

ⓒ연합뉴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초록동색(草綠同色)’이다. 비슷한 듯하면서 조금은 달랐고,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했다. 한때 서로 끈끈한 동지애를 느낀 적도 있었고, 서먹서먹한 관계로 멀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누가 무어라 해도 두 사람은 지금의 민주당을 만든 주인공이자 최대 주주들이라고 할 수 있다.

DJ가 노 전 대통령을 ‘될성부른’ 정치인으로 평가했던 것은 지난 1988년 ‘5공 청문회’에서였다. 청문회장에서 ‘정치 초년병’ 노무현이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을 상대로 논리적인 언변으로 몰아붙이는 장면이 DJ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으로 여권에 들어가자 노 전 대통령이 강하게 반발하며 ‘꼬마 민주당’에 잔류한 것도 DJ의 호감을 샀다고 한다.  

지난 1997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했다. 자신의 그늘로 들어온 영남 정치인 노무현을 이후 DJ는 아낌없이 지원했다. 1998년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 공천해서 당선시켰고, 2000년에는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앉히기도 했다.

“DJ, 대선 후보로 노무현 원했다”

DJ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정은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최절정에 달했다. 당시 DJ는 심중에 차기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노무현을 이미 낙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DJ의 복심’으로 알려진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면 하고 희망했었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후보 경선 당시 ‘노풍(盧風)’의 진원지가 되었던 광주 지역 경선에 DJ의 암묵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결국, DJ의 의중대로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두 사람 사이에 결정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 사건이 발생했다. 2003년 참여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대북송금 특검’ 문제가 불거졌고, 당시 노대통령이 특검을 수용했던 것이다.

당시의 청와대 핵심 고위직에 있었던 정치권의 한 인사는 최근 기자와 만나 새로운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뜻도 특검을 하는 것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 것이었다. 새로운 정부(참여정부)에서 특검을 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국무위원(장관) 가운데서도 한 명만 빼고 대부분은 특검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일이 꼬이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그는 “당시의 전모를 지금 이 자리에서 세세히 말할 수는 없다”라며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이 관계자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노 전 대통령이 특검을 수용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박지원 전 비서실장과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 DJ의 핵심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참여정부에서 김대중 정부 시절 벌어졌던 국정원의 불법 도청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인권 대통령’으로도 불린 DJ는 또 한 차례 곤혹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노 전 대통령에게 DJ는 자신을 길러준 ‘정치 스승’이었다. 반면에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꼬마 민주당’ 시절 ‘3김 정치’의 벽을 뼈아프게 체험한 바 있다. 그런 그에게 ‘3김 정치’의 유물인 제왕적 대통령제와 금권 정치, 지역주의 등은 반드시 청산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남북 관계 연결 고리는 계속 유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분당 사태로 노 전 대통령과 DJ는 서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듯했다. ‘정치 결별’로도 해석되었다. 2004년 1월 열린우리당을 창당했으나 같은 해 3월 ‘대통령 탄핵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탄핵의 역풍에 힘입어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무려 1백52석을 확보해 과반 여당이 되었다. 반면, ‘정통성’을 강조해왔던 민주당은 아홉 석으로 전멸하다시피 했다. 당시 DJ 입장에서는 같은 뿌리에서 자란 ‘자식들’이 치고받으며 싸우는 모습이 무척이나 괴로웠을 법하다. 

하지만 참여정부는 우왕좌왕했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열린우리당에는 1백52명의 국회의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1백52개의 정당이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았다. 여기에 노 전 대통령이 급기야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추진하면서 호남과 진보 진영의 지지층마저 떨어져나갔다. 어쩔 수 없이 참여정부의 실패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등 이른바 ‘범민주 세력’의 위기로 귀결되었다.

그나마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면서 끊어지지 않았던 가장 큰 연결 고리는 남북 관계였다. 지난 2007년 10월,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직후 김 전 대통령은 “1차 정상회담 때 뿌린 씨앗이 크게 성장했다. 노대통령이 재임 중 큰 업적을 남겼다”라고 평가했다.

역설적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출현도 한몫을 했다. 민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이명박 정부 들어 여권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한데 묶어서 규정한 것이 오히려 두 사람을 심정적으로 하나로 연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현 정부 들어 열린우리당과 구 민주당은 통합신당을 거쳐 다시 민주당으로 하나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 때 청와대 정무수석과 노무현 정부 시절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한 문희상 국회부의장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위치는 큰 테두리 안에서 같다. 정치적 뿌리가 같고, 민족의 갈 길에 대한 생각도 같았다”라고 말했다.(제목: "친노 진영 창당은 역사 앞에 죄 짓는 것" 기사 참조)

하지만 화학적인 결합은 쉽지 않아 보인다.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이어 이번 DJ 서거에도 ‘상주’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문제는 민주당의 향후 리더십이라는 지적이다. 이미 ‘DJ-노무현 10년 정부’의 가치는 조문 정국을 통해서 어느 정도 평가받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 정치평론가의 지적처럼 “과연 지금 민주당이 이러한 거대 담론을 다 담을 만한 포용력이 있는 그릇이 되느냐” 하는 점이다.

친노 세력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민주당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다. ‘친노 진영’의 한 부분인 이병완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천호선 전 청와대 대변인 등은 이미 독자 신당을 창당할 움직임을 밝히고 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과 이해찬 전 총리는 여전히 민주당의 손길을 외면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민주당을 중심으로 민주 세력이 연대할 것을 주문했던 DJ마저 서거하면서 민주당과 친노 진영 등 범민주 세력 내에서는 여기저기서 다양한 목소리들이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마저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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