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통합’ 리더십으로 통념의 굴레 뛰어넘었다
  •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애널리스트) ()
  • 승인 2009.08.2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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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실장에 TK 김중권 임명하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 지원도 약속, 의회와 당 존중…사감 버리고 포용 선택

▲ 2001년 7월16일김 전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 21세기 국정자문위원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오른쪽은 김중권 당시 당 대표.


조선 시대 훈구파에 대항해 등장한 정치 세력을 통칭 사림(士林)이라고 부른다. 고려 말, 그들은 조선 건국에 반대했다. 덕분에 정치적 패자가 되어 건국 후 80~90년 동안 향촌에 칩거해야 했다. 그러다가 성종(1469~94) 때부터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정계에 등장했다. 피바람을 일으킨 여러 사화(士禍)를 거쳐 선조(1567~1608) 때에 이르러 마침내 집권 세력이 되었다. 

DJ가 처음 대권에 도전한 것은 1971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었다. 민주화를 바라는 여망 때문에 DJ는 시종일관 박정희를 압도했다. 4월18일 장충단 유세에서는 그때까지의 선거 사상 가장 많은 30만명 이상이 운집했다. 금품 살포, 선거 부정이 아니었다면 7대 대선의 승자는 DJ였을 것이다. 예컨대, 전남의 무효표가 유권자가 가장 많은 서울에서의 무효표보다 두 배 넘게 많았다. “나는 국민의 지지를 도둑맞은 것이 분명하다”라고 DJ는 말했다.

선거에서 독재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이 그에게 ‘원죄’로 작용했다. 그 후 DJ는 지역 감정의 화신으로 매도당했다. 중앙정보부에 납치되어 생사의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사형수로 옥살이도 했고, 빨갱이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그 엄혹한 파상 공세를 뚫고 1997년 기적처럼 대선에서 승리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덕에 어렵게 성공한, 사상 초유의 평화적 정권 교체였다. 사림이 그랬듯이, 오랜 도전과 박해 끝에 이루어낸 집권이었다.

이 대목에서 도발적인 질문 하나. 조선 시대 사림은 과연 나라 운영에 성공했나? 솔직한 대답 하나. 그들은 권력 투쟁에 능했을 뿐 국가 경영에는 무능했다. 집권하자마자 민생 개혁보다는 동서로 나뉘어 당쟁을 시작했다. 그 덕에 곧바로 왜란에 속수무책 당해야 했다.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양반 독점의 사회를 고집하다 전쟁의 참화(병자호란)를 초래했고, 마침내 세도 정치를 낳았다. 정조가 죽고,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한 뒤 안동 김씨 세도 정치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나라 잃은 경술국치였다. 최악의 성적표이다.

DJ는 과연 시대 과제를 해결했나? 그는 외환위기를 유능하게 극복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물론 아쉬운 대목도 적지 않다. 허나 세계가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금 모으기 운동 등 국민 열정을 추동하면서 위기를 신속하게 수습한 것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정치 셈법으로 보면, ‘IMF 졸업’을 일찍 선언하는 것은 손해였다. 위기 프레임이 살아 있어야 위기를 초래한 세력의 잘못을 계속 환기시킬 수 있고, 구 체제를 바꾸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졸업’을 늦추자는 제안도 있었다. DJ는 거부했다. 득실보다 국민 자존심을 빨리 회복시켜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생 토양 만들어

▲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김 전 대통령.

DJ는 영남의 지지 없이 집권했다. 그가 영남에서 얻은 지지율은 13.2%였다. 그나마 그것도 사실은 산업화 시대에 공장 없는 고향을 떠나 영남의 도시로 진출한 호남 출신자들의 지지였다. 따라서 사실상 영남의 지지는 거의 받지 못한 채 대통령이 된 것이다. 1971년 대선 때 DJ는 부산에서 42.6%, 경북에서 23.3%, 경남에서 25.6%를 득표했다. 26년 동안 지독하게 매도당한 결과였다. DJ는 이기고서도 ‘호남 대통령’으로 폄훼되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에 네 번이나 당선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다. 최악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백악관에 살던 13년 동안 전임자인 후버를 단 한 번도 초청하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자기 딸의 피아노 연주를 혹평한 평론가의 따귀를 때렸다. 이렇듯 대통령도 애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설사 당위나 책무라고 할지라도,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더군다나 30년 가까이 부당한 핍박을 받은 경우라면 복수까지는 아니더라도 한풀이 욕구만큼은 접고 싶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DJ는 이런 통념의 굴레를 훌쩍 넘어서는 화해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DJ는 비서실장에 김중권을 임명했다. 그는 TK의 일원으로, 민정당에서 3선 의원을 지낸 사람이었다. 노태우 정권에서 정무수석을 역임했다. 말하자면, 가해자의 일원이었다. 그런 그를 최고 중책에 임명하고, 실권까지 준 것은 놀라운 선택이었다. DJ는 역시 TK 출신인 이수성 전 총리를 평통 수석부의장에 임명했다. DJ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 어젠다가 통일 문제 아니던가. ‘사람이 곧 메시지이다(People are message).’ 그것은 자신을 핍박한 사람들, 자신을 냉대한 영남을 끌어안겠다는 통합의 메시지였다. 

흔히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가 백악관 비서실장에 제임스 베이커를 앉힌 것이다. 그는 당내 경선에서 자신과 경합했던 사람의 선거본부장이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태평성대를 연 인물이라면 단연 당 태종이다. 당 태종은 왕자들의 난 때 반대편에 섰던 위징을 요직에 발탁했다. 김중권이 베이커나 위징에 비견될 만한지는 논외이다. DJ가 그들만큼 업적을 남겼는지도 논외이다. 하지만 DJ가 그를 기용한 것만큼은 레이건이나 당 태종의 선택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또, 그것은 27년 옥살이 끝에 출소한 만델라가 백인 정권의 클레르크 대통령과 타협함으로써 백인을 포용한 것에 못지않다. 

그 후에도 DJ의 화해와 통합 행보는 계속되었다.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까지 몰아갔던 박정희를 용서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정부 차원의 지원을 약속했다. 경북 북부 지방의 유교 문화 육성, 대구의 섬유 산업을 지원하는 밀라노 프로젝트 등에 수천억 원을 투입하는 이른바 동진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국민회의의 호남 틀을 깨고 전국 정당(새천년민주당)을 만들었다. 시민운동가 서영훈, 영남 출신 김중권을 당 대표로 내세웠다. 이처럼 DJ가 꾸준하게 추진한 통합 정책은 뒤에 노무현 대통령이 성장·배출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물론 동진 정책은 단기적으로 실패했다. 16대 총선 결과, 민주당은 영남에서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김중권조차 낙선했다. 이런 점에서 영남대 김태일 교수의 지적은 통렬하다. “밀라노 프로젝트의 일차적 수혜자는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한나라당의 강고한 지지 기반을 이루고 있던 섬유업계였다. 기술 고도화보다는 국가의 특별 지원으로 연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이 지역 섬유업계는 밀라노 프로젝트를 반겼지만, 경제 사회의 기득권을 혁신하고 새로운 산업 기반을 만들고자 하는 개혁 세력들은 크게 실망했다. 개혁 세력들은 허탈했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동진 정책이 낳은 기저 효과조차 부정해서는 안 된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 이명박 정부에서도 당·정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대통령으로서는 정통성을 놓고 경합해야 하는 국회를 소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유익하다. 국회에서 몸싸움, 날치기가 벌어지면 국민들은 국회와 정당에 대해 혀를 차게 된다. 자연스레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게 된다. “의회가 교착 상태에 빠지면 행정부의 권력이 강화된다.” 콜롬비아 대학 교수 마크 마조워의 지적이다. 대통령이 이런 계산을 하고 있다면 당정 관계는 언제나 꼬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당·정 갈등이 해소되려면 그 관건은 당권과 대권 분리가 아니다. 당과 국회를 존중하는 대통령의 마음, 즉 의회주의에 대한 소신이다.  

당정 갈등 막은 DJ의 의회주의 소신

DJ는 동교동계라는 가신 그룹의 절대적 충성을 누렸다. 야당 총재 시절 그는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이 되면 당을 일방적으로 옥죌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하지만 DJ는 그러지 않았다.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하고 있었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상명 하복보다는 소통하는 협의 모델에 가까웠다. 먼저 각하라는 구 시대적 호칭을 없앴다. ‘대통령님’으로 바꿨다. 그는 또 국정 운영에서 당의 몫을 인정했다. 당에서 요구하면 수용했다. 수시로 만나 당의 의견을 청취했다. 내각에 당의 인사를 잊지 않고 배치했다. 공천도 당이 주도했다. “DJ는 당을 존중했다.” DJ를 가까이서 보좌한 김한길 전 대표의 전언이다.
서구 역사에서 의회주의는 왕권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 체제였다. 그러나 의회주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무능을 낳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독재가 번창한 것은 의회주의의 비효율성 때문이었다. 요컨대, 의회주의는 민주주의에 필수적이지만 비효율 때문에 얼마든지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의회 경시는 곧 민주주의 후퇴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DJ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DJ는 의회를 존중했다. 2001년 한나라당 주도로 국회는 임동원 통일부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다. 법적으로 수용할 의무가 없다는 법적 해석도 있었고, 또 얼마나 아끼던 임장관이었나. 그럼에도 DJ는 국회 건의를 수용해 그를 경질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김두관 행자부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무시했다. “해임건의안 통과는 정말 부당하며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이다”라고 노 전 대통령은 말했다. 논란은 김장관의 사표 형식으로 일단락되었다. 둘의 대응 차이를 통해 DJ의 의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좀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링컨도 보기에 따라서는 노예들을 해방시킨 영웅이 아니다. 영국과 경쟁할 수 있는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정치적 기획으로 동족상잔의 내전을 일으킨 야심가였다.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무엇으로 기억하고, 어떤 가치로 추억하느냐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두 가지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하나, 그는 부당하게 핍박받고, 매도당하고, 폄훼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 그는 민주화·통합·평화를 위해 사감을 버리고 포용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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