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포스트 DJ로’ 뜰까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09.09.2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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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보선 앞두고 집요한 ‘러브콜’ 받아…중량감 있는 대선 후보 중 하나로도 꼽혀

▲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문 기간 중서울광장 빈소에 늦은 시간임에도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가운데 상주로 참석한 정동영 의원(오른쪽)과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인사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10월 재·보선을 앞두고 거물급 정치인들의 귀환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여야 간에 사활을 건 격전이 예고되는 만큼 전장에 나설 장수의 위상도 높을 수밖에 없다. 가장 주목되는 정치인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이다. 지난해 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이후 1년 넘게 칩거 생활을 해 온 그가 이번 선거를 통해 정치 일선에 복귀하느냐 여부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일찌감치 손 전 대표를 수원 장안에 전략 공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본인이 고사를 거듭하자 당 차원에서 전 방위로 설득 작업을 펼쳤다.

송영길 최고위원을 비롯한 가까운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손 전 대표의 고민은 후배 정치인이 열심히 뛰었던 지역구에 출마를 해야 하느냐는 문제의식에 있다.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종로를 떠나는 데 대한 부담감도 적지 않아 보인다. 여기에 ‘국회의원 한 번 더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평소 생각이 더해져 고민이 깊어진 듯하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 서민행보 등에 대해 민주당이 너무 오래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것이다. ‘이대통령의 행보를 사기, 위장으로만 비판해서는 안 된다’라는 지적도 했다. 민주당은 손 전 대표의 출마가 비난 여론이 높은 이른바 ‘낙하산 공천’과는 다르다며 설득에 나섰다. 우선 이 지역 이찬열 위원장이 당의 발전을 위해 손 전 대표가 출마한다면 ‘100% 환영하고 협력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가 공천을 받자 김양수 전 의원이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경남 양산과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 손 전 대표가 당선될 경우 단순히 국회 의석 한 석이 늘어나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당 지도력을 보강함으로써 내년 지방선거는 물론 향후 정권 교체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대의명분도 내세우고 있다.

정세균 대표 “최소한 5~7명 정도 대선 후보군 형성돼야”

손 전 대표가 이번 재·보선을 통해 여의도로 복귀한다면 민주당 내 대권주자 경쟁도 조기에 불붙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출마가 김근태 전 의장의 복귀와 더불어, 무소속 정동영 의원과 친노(친노무현) 유력 인사들의 입당으로 이어지는 ‘통합의 신호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세균 대표의 구상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정대표는 최근 전남대 강연에서 “민주당에 최소한 5~7명 정도의 대선 후보군이 형성되어 그분들이 경쟁하면서 다음 정권을 탈환할 수 있는 당으로 만들자는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우상호 대변인은 “민주당의 큰 약점 중 하나가 인물이 없어 보인다는 것인데, 우리도 다양한 인사들로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서 당을 활성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설명했다.

손 전 대표가 합류할 경우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포스트 DJ’ 경쟁이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을 물려받을 후계자로 누가 낙점되느냐에 따라 향후 민주당 내 세력 재편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다. 낙점자는 당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동교동계의 지원을 받는 한편, 당의 정통 지지 기반인 호남의 표심을 얻는 데 유리한 국면을 형성해나갈 수 있다.

그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정동영 의원과 정세균 대표가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의원은 무소속이지만 조문 정국에서 ‘DJ의 적자’를 자처했다. 대선 후보를 거치면서 호남에서 유력 정치인의 입지를 다졌다. 정대표는 제1 야당인 민주당의 대표로서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 정국에서 상주 역할을 맡았다. 미디어법 장외투쟁을 이끌면서 취약점으로 지적되던 인지도도 상당 부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정치인 모두 호남 출신이다.

순위에서 밀렸지만 손 전 대표도 정치 일선에 복귀하는 그 순간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DJ의 복심’으로 불리는 박지원 정책위의장은 ‘삼고초려’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의 출마에 적극성을 보였고, 동교동계에서는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손 전 대표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 대권 주자에 대한 의례적인 평가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지난 대선을 전후해 형성되었던 범민주계 내의 분위기를 되돌아보면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손 전 대표가 한나라당을 뛰쳐나온 후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 범민주 진영에 합류하게 된 데는 김 전 대통령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대북 화해 정책을 지지했던 그는 탈당 이후 ‘햇볕정책 계승’ 입장을 더욱 분명히 했다.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방북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김 전 대통령을 예방하기도 했다. 대통합 물결에 합류하기 전의 일이다.

당시 범여권 대선 후보 지지도 1위를 달리던 손 전 대표와 민주 진영의 정신적 지주인 김 전 대통령의 회동은 정치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일각에서는 ‘DJ-손학규 연대설’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동교동계 가신 그룹의 막내 격인 설훈 전 의원이 손학규 선거 캠프에 합류해 상황실장을 맡자 ‘김심(金心)’이 손 전 대표에게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현재 광주시당위원장인 김동철 의원이 비서실장을 맡게 된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권노갑 전 고문의 보좌관 출신인 김의원은 국민의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을 지냈다.

하지만 손 전 대표는 대선 후보 경선을 거치면서 높고도 두터운 벽에 부닥쳤다. 패배로 끝난 선거 결과도 결과이지만 끊임없이 정체성 검증을 요구받았다. 범민주 진영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던 때와는 1백80˚ 상황이 달라졌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경선 기간 내내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통합된 민주당의 대표직을 맡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며 ‘독배’를 받아들였지만, 리더십에 대한 평가와 함께 정체성 문제는 다시 도마에 올랐다. 칩거에 들어가기 얼마 전까지 그랬다.

민주당은 다시 손 전 대표가 무대 위로 올라서기를 바라고 있다. 그 역시 언제까지 조명을 피해 다닐 수는 없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당내 경쟁 구도가 치열해지면 정체성 공방은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그런 만큼 손 전 대표 입장에서는 ‘포스트 DJ’로서 입지를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확보하느냐가 중요하다. 물론 민주당 내에는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체성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정치 공세일 뿐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또, 실제 공세의 위력도 상당 부분 약해져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민주당의 한 호남 인사는 “민주화 운동 출신으로 뿌리가 같고 햇볕정책을 계승한다는 정치 철학도 같다. 정서적 이질감이 없다”라고 밝혔다. 그는 “과거 민주화 세력이 평민당 분당 과정에서 갈라선 점을 고려하면 단순히 한나라당에서 건너왔으니까 정체성이 다르다고 해서는 안 된다. 손 전 대표가 우리 당으로 왔을 때 광주시당에서 가장 먼저 환영 논평이 나갔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대목이다”라고 지적했다. 


▲ 춘천 농가에서 닭에게 모이를 주고있는 손학규 전 대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생활하는 농가는 춘천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 마을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대문도 돌담도 따로 없는 조립식 단층 건물을 지나 널따란 마당에 들어서자 수염이 까칠한 손 전 대표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간이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그는 기자의 방문에 의자를 내주면서 “인터뷰는 다음에 하자”라고 했다. ‘언제쯤 서울에 올라갈 계획이냐’라고 묻자 “아직 예정에 없다”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손 전 대표는 마당 끝에 지어진 닭장으로 향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모습이 영락없는 농부였다. 100일 민심 대장정에 나섰던 당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시골 생활을 하면서 가졌던 생각들을 들려주었다. 최근에는 산 비탈길에서 알을 품은 어미 닭을 보고는 감명받았다고 했다. 스무날 이상을 품어야 하는데 비가 아무리 와도 꿈쩍도 않더라는 것이다. 대단한 모성애인 셈이다.

온몸의 털이 여기저기 뽑혀나갔는데도 알을 감싸 안은 부위만은 털이 깨끗하더라고 했다. 알이 물에 닿으면 제대로 부화할 수가 없다. 비가 쏟아지고 흙탕물도 흘러내리는데 어떻게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문득 정치 지도자라면 알을 품은 어미 닭 같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미 닭에 대해 언급하는 손 전 대표의 말의 행간에서 현재 표류하는 민주당의 위기를 안타까워하는 듯한 전직 대표로서의 모성애가 느껴지기도 했다.

닭장을 둘러보는 사이 부인 이윤영 여사가 차와 과일을 내놓았다. 의자에 다시 앉아 담소를 이어갔다. 손 전 대표는 중간 중간 “전화가 왔다”라는 이여사의 말에 집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몇 통화는 10월 재·보선 출마를 요청하는 민주당 지도부의 전화가 아닐까 싶었다. 비록 몸은 춘천에 머물러 있지만, 고뇌의 한 자락은 서울로 향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끝까지 말을 아꼈다. 예의 신중함이 느껴졌다. 농가를 나서며 ‘다시 뵙겠다’라는 인사에 미소로 답했다. 마을 어귀를 돌아설 때까지 손 전 대표 부부가 먼발치에서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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